피곤하구나 자야하는데...
그래도 뭔가 한글자 남겨야 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들어왔다.
요즘 정말 생각이 많아진다.
고3때도 이렇게 생각하진 않았는데 아무래도 머리가 굵어지긴 했는 갑다.
(갑자기 어떤 전도사님 기도가 생각나네..ㅎㅎ
"머리통이 굵어졌다고 부모의 말을 안듣는 일이 없게 하여 주옵시고...."
ㅎㅎ 기도 듣다가 웃겨 죽는줄 알았지.....)
어쨌든간에...
생각이 많다.
그래서 잠을 못자고 다음날 낮에 자게되고.
낮과 밤이 점점 바뀌다 보니
야밤에 할게 없어 또 생각을 하게 되고
이래저래 머리만 놀리는 구나.
생각하는데도 칼로리 소모가 되겠지? 뇌활동에 필요한건 산소랑 포도당이니 포도당은 포도당대로 소모될꺼고 산소공급 막 하려면 호흡운동이 있어야 할테니 거기도 칼로리 소모가 있을꺼고.
그럼 꿈도? REM이니 뇌 운동이 활발 --> so. 살이 빠지나??
그랬으면 좋으련만.
지금 50kg 정도 되었을꺼 같은데..
웃기지? 나도 웃겨 ㅎㅎ 어짜피 뭘 적어야 할지 모르고 들어온거니까.
본론으로 들어가자.
난 영화만 보면... 그 영화에서 얻은 감동을 이기지 못해서 하는게 하나있어.
바로.... 영화에서 나온 어떤 한 장면을 내 삶에 가져오는거.
그중에 하나가 내 머리속의 지우개에 나온 야구연습장 장면이야.
극중에서 중요한 역활을 하는 야구 연습장.
호쾌하게 방망이를 돌리든 정우성의 모습
그리고 뒤에서 맞을 때 마다 좋아하며 창살에 매달려 웃는 손예진.
그 장면이 너무너무 인상이 깊었어.
그래서..ㅎㅎ
요즘 밤마다 경성대에 있는 야구연습장에 가서 오백원짜리 동전 5개씩 바꾸어서 즐기고와.
오백원에 공이 20개니까 5번하면 100번의 스윙
돈넣기전에 연습으로 대여섯번 휘두르니 근 백삼십번정도 휘두르는 셈이네.ㅎㅎ
나름 운동 되는 느낌.ㅋ
밤에 시원하게 땀 흘리면 기분이 참 좋아진다.ㅋ
예전에 도장에 다닐때 느끼던 그런 느낌.
다 쏟아붇고 나서의 그런 후련감??ㅎㅎ
첨에는 헛스윙 대여섯번에 파울성으로 한두개 맞더니
요즘엔 좀 잘맞더라.ㅎㅎ
안타 : 파울 : 헛스윙 비율이 2대 3대 2 정도 되는 거 같아.
가끔 홈런성 나오면 나도 모르게 "그렇지!!!!"하고 소리질러서 주위사람들이 쳐다본다.ㅎㅎ 쪽팔리는 것도 없어. 그냥 즐기는 거지.ㅋㅋㅋ
그럼 뭐하나.ㅎㅎ
뒤에서 봐줄 손예진이 없는 걸.ㅋㅋㅋㅋㅋㅋㅋ
손예진 생기면 담에 꼭 데리고 야구연습장에 가야지.ㅎㅎ
" 오빠가 치는거 잘 봐!!!!"
하면서 호쾌하게 치는거지..ㅎㅎ
그러기 위해선 연습 또 연습이다.!!!!
데리고 가서 헛스윙만 할 수는 없자나!!!!
얼른 내앞에 나타나 주라...ㅠ
분명... 천사같이 좋은 사람일꺼야!!
에고 자자 .... ㅠ
[ 내 머리속의 지우개 대본 ]
내 머리 속의 지우개 (Eraser in my head)
1. 기차역 (가을) 낮
벤치에 앉아있는 봉두난발의 노숙자, 담배를 거꾸로 잡아 필터를 손바닥에 튕긴다. 손톱에 때가 꼬질꼬질... 노숙자는 옆에 멍하니 앉아있는 젊은 남자(철수)를 슬쩍 본다. 철수는 깔끔한 정장차림이지만 수염이 며칠 된 것 같다. 노숙자, 담배를 꼬나 물고 불을 찾다가, 철수에게 말한다.
노숙자: 아저씨, 불 있으면 한번 좀 주죠?
철수, 멍한 표정으로 주머니에서 뭔가 꺼내 노숙자에게 건넨다. 손에 쥐어있는 것은 미완성된 작은 (여자)목각인형... 노숙자, 황당해 하며, 코방귀를 낀다. 철수, 정신을 조금 차린 듯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피식 웃는다.
노숙자: 불 있냐구. 불.
철수: (살짝 미소 지으며 그러나 여전히 멍한 눈빛으로) 기억이 사라지면... 영혼도 사라진대요.
아직도 담배 불을 못 빌린 노숙자, 짜증이 난다.
노숙자: (지나가는 다른 사람에게) 아저씨, 불 있어요?
철수: (중얼거리듯 혼잣말로) 그 말 죽이죠? 기억이 사라지면 영혼도 사라진다... 그럼 천국에 가면 다 기억할 수 있나? 영혼이 된다면 말이죠... (중얼중얼)
철수의 목소리는 환청처럼 들리고 점차 시계바늘 소리와 디졸브[DISSOLVE] 된다... 카메라, 철수가 들고있는 목각인형으로 클로즈업된다. '찰칵찰칵...' 카메라, 철수의 뒷모습에서 서서히 [BOOM-UP되어] 올라가다가... 벽에 높이 걸려있는 큰 벽시계가 보이고... 시계바늘이 오후를 가리킨다...
카메라, 다시 [BOOM-DOWN되어] 내려가면 벤치에 앉아있던 철수는 없고, 그 자리에 젊은 여자(수진)가 앉아있다. 그녀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모습...
캐주얼하지만 세련된 옷차림의 수진, 손목시계를 몇 번이고 본다. 그녀 바로 옆에는 (철수에게 담뱃불을 빌리려던) 노숙자가 쭈그리고 자고 있다. 노숙자는 다른 옷을 입고있다. (걸어 다니는 사람들도 다르다. 계절도 다르다. 광고판들도 다르다. 과거로 돌아간 것인가?)
천정의 유리창을 보면, 파란하늘에 떠있는 하얀 뭉게구름이 점차 개이며 태양이 보이기 시작한다. 벽시계의 시계바늘이 느리게 움직이는 동안, 기차역 안의 사람 Silhouette 느낌들 사이로 강렬한 햇살이 들어온다. 햇살이 서서히 움직여서 자고있는 노숙자의 얼굴을 강하게 내리쬔다. 눈을 갸름하게 뜨는 노숙자, 얼굴이 일그러진다.
노숙자: (혀를 차며) 애이 씨...
노숙자, 궁시렁 궁시렁, 머리에 베고있던 신문을 이불 펴듯이 조심스레 펼치고는, 얼굴 위에 얌전히 얹어놓는다. 다시 잠을 청하는 노숙자. 뭐라고 중얼거리지만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다. 노숙자를 무심히 보던 수진, 다시 주위를 두리번거리기 시작한다. 바쁘게 움직이는 그녀의 눈동자. 아무리 둘러봐도 찾는 사람이 없는 듯... 한편, 햇살은 노숙자의 몸을 부드럽게 타고 내려간다 파리의 이미지: 창문 밖으로 날으려다가 자꾸 부딪히는 파리의 모습. 시간의 흐름과 교차하며 몇 번 반복해서 보여주기. ...
어느새 햇살이 수진의 얼굴 한쪽에 닿는다. 고개를 움직여 햇살을 피하는 수진. (표정이 조금 코믹하다.) 빛이 서서히 움직여 수진의 얼굴에 다시 번진다. 히프를 이동해서 햇살을 피하는 수진. 한쪽 히프만 벤치에 걸쳐있는 상태. 그래도 햇살은 수진쪽으로 계속 다가오고, 수진은 이때 기차역의 시계를 올려본다. 오후 여섯시 반...
이제 벤치에 걸터앉는 상태에서는 더 이상 햇살을 피할 수 없다. 수진은 작은 여행가방을 힘껏 움켜쥔다. 그리고는 잠시 머뭇거린다. 그러다가, '피식' 씁쓸하게 웃는다.
가방을 어깨에 짊어지고 기차역 밖으로 빠르게 걸어 나가는 수진. 출구 바깥의 밝은 햇살이 그녀를 감싼다...
2. 시내 거리1 해질 무렵
수진이 굳은 표정으로 거리를 한참 걷고 있는데, 행인 한명이 수진에게 다가온다.
행인1: 저기 길좀 묻겠스읍...
수진, 들은 척도 않고 행인을 지나친다. 행인, 기분 나쁜 표정으로 여자의 뒤통수를 쏘아본다. 수진은 고개를 떨구며 빠르게 걷고있다...카메라, 수진의 얼굴을 보면, 그녀는 눈물을 흘리고있다. 갑자기 터지는 울음에 입을 틀어막는 수진. 손에 쥐고있던 두 장의 기차표가 흘러내린다. 땅에 흩어져 떨어지는 기차표 두 장... [SLOW-MOTION]
[INSERT:] 마천루의 실루엣 뒤로 붉게 노을 진 하늘이 보인다. 태양이 서서히 사라진다 태양이 하늘 위에서 가로로 사라지는 현상을 보여주기..
3. 편의점 밤
(세븐일레븐 스타일의 평범한 편의점.) 편의점 냉장고 문이 열린다. 수진이 냉장고 안을 보고있다. 그녀는 감정을 쇠진한 듯, 표정이 여전히 멍하다. 냉장고 안을 살펴보면 시원한 음료수들이 가득 진열되어있다. 이것저것 살피다가 코카콜라를 집어 드는 수진, 곧장 카운터로 간다. 카운터 뒤에는 편의점직원이 쭈그려 앉아 벽에 위치한 담배진열대를 한창 정리중이다. 카운터에 콜라를 올려놓고 가방에서 지갑을 꺼내는 수진. 편의점직원, 하던 일을 멈추고 수진을 향해 일어선다.
편의점직원: 500원입니다.
수진은 지갑에서 1000원짜리 지폐를 꺼낸다. 돈을 받는 편의점직원, 현금 출납기 버튼을 누르는데 작동이 안 된다.
편의점직원: 아, 또 시작이네!
거스름돈을 기다리는 동안, 수진은 핸드백에 있는 화장지를 꺼내 콜라를 닦는다. 이때 자연스레 지갑을 계산대 위에 놓게 된다. 콜라를 닦으며 뭔가 골똘히 생각에 잠기는데...
편의점직원: 여기요.
편의점직원, 500원 거스름돈을 챙겨주며, 다시 뒤로돌아 담배 갑들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이때, 수진, 무표정한 얼굴로 동전을 주머니에 넣으며 밖으로 걸어나간다.
편의점 근처 거리 계속
멍하니 거리를 걷던 수진, 자기의 빈손을 보고는 '아차!'하는 표정을 지으며 편의점 쪽으로 방향을 돌린다.
4. 편의점 계속
수진, 서둘러 편의점 문을 여는데 한 젊은 남자(철수)와 마주친다. 철수의 상태는 첫 장면에서와 너무 다르다. 알아보기 힘들 정도다. 헝클어진 머리에 지저분한 공사장 인부 옷차림. 며칠 된 수염에는 톱밥이 깨알같이 붙어있다. 외모는 노숙자와 다를 것이 없고, 그는 몹시 지쳐 보인다. 그리고 철수의 손에는 콜라가 쥐어져 있다.
서로를 비키려다 방향이 충돌하여 마주보고 서게 되는 수진과 철수. 순간, 수진은 철수가 손에 쥔 콜라를 포착한다. 순간적으로 철수 어깨 너머로 편의점 안을 보는데, 카운터 위에는 아무것도 없고, 편의점직원은 여전히 뒤로돌아 담배를 정리하고있다. 잽싸게 눈을 돌려 철수를 쏘아보는 수진, 철수가 자기 콜라를 챙겼다고 의심하는 기색이다. 그리고 빠르게 철수를 위아래 훑어본다. 의아해지기 시작하는 철수, 옆으로 움직이는데, 수진이 갑자기 철수를 막고 선다. 갑자기 흐르는 긴장감...
수진, 몹시 기분 나쁜 표정으로 철수를 노려본다. 피곤해 보이는 철수, 영문을 이해 못한 듯, 콜라 캔을 느리게 따기 시작한다. '촤아아하~' 시원한 탄산가스 터지는 소리가 두 사람에게 들린다. 군침을 삼키며 콜라 향을 음미하는 철수. 자기를 노려보고있는 수진을 쳐다보며 콜라를 들이키려 하는데, 순간 수진은 철수의 콜라를 잽싸게 낚아챈다. 그리고는 한 모금을 먼저 마신다. 갑작스러운 일에 약간 놀라는 철수, 표정이 굳어지며 수진을 가만히 쳐다본다. 수진, 씩씩거리다 콜라를 한 숨에 다 마셔버린다. 곧 갑작스럽게 터져 나오는 트림...
수진: 거어억...
수진, 난감한 표정으로 곧장 자기 입을 틀어막는다. 철수, 어이없지만 수진의 행동이 은근히 귀엽다. 오히려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에 반한 듯...
수진, 차가운 눈빛으로 빈 콜라 캔을 철수에게 돌려주고는, 뒤로 휙 돌아 걸어간다. 철수, 어둠 속에 사라지는 수진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본다. 철수의 입가엔 미소가 살며시 드러나고... 철수, 곧 콜라 캔을 거꾸로 들어 남은 몇 방울을 입에 떨어뜨려 보고는 쓰레기 통에 던진다. 그리고 피식 웃는다.
5. 버스 안 밤
정차중인 버스 안. 편의점 근처. 버스운전사는 답답한 표정으로 수진을 쳐다보고있다. 수진은 가방 안을 분주히 살피며 무언가를 찾고있는데...
버스운전사: (신경질적으로) 그냥 타요.
수진: 저기... 그게...
버스 뒤쪽에서 '빵빵~' 소리가 들려온다. 곧 가방을 닫는 수진.
버스운전사: 그냥 타라니까요. 다른 손님 기다리는데!
수진: 죄송합니다. 내릴게요.
6. 편의점 밤
서둘러 편의점 안으로 다시 들어오는 수진. 이때, 카운터 뒤에 서있던 편의점직원이 수진을 발견함과 동시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수진의 지갑, 그리고 콜라 캔을 카운터 위에 올려놓는다.
편의점직원: (환한 표정으로) 급한 일이 있으셨나봐요?
순간 얼굴이 붉어지는 수진. 콜라와 지갑을 챙겨 들고는 서둘러 거리로 나선다.
편의점 앞 거리
수진은 혼자 이상한 소리로 웃으며 거리로 뛰쳐나온다. 창피함에 압도 당한 듯... 지나가는 행인들이 이상하게 쳐다본다. 수진은 주위를 둘러보지만, '그'는 보이지 않는다. 어디로 갔을까?...
7. 수진 부모의 집 그날 밤
불이 켜지면 수진의 방이다. 방안은 가지런히 정돈되어있다. 방안으로 수진이 조용히 들어오면서 짐을 내려놓는다. 문지방 뒤에는 수진의 어머니와 여동생 정은(18)이 서있다. 침대에 걸터앉는 수진, 방안을 둘러본다.
어머니: 네가 쓰던 거 다 그대로야.
수진: 이불이 바뀌었네.
어머니: 빨아 놓은 거야. 수진이 배 고프지?
정은: 언니, 그럼 완전히 끝난 거야?
어머니: 정은아!
어머니, 정은을 조용히 복도쪽으로 민다. 수진, 말없이 정은을 쳐다본다.
정은: (수진의 방으로 들어오며) 아빠가 둘이 깨지라고 맨 날 새벽기도 다닌 거 알아?
어머니: (정은을 방 밖으로 끌어내며) 야, 빨리 니 방 가 공부해.
수진: (씁쓸히 미소 지으며) 기도가 이루어졌네.
정은, 방안으로 들어와 책상의자에 앉는다.
어머니: 야, 빨리 가 공부하라니까?
정은: 싫어. 다했어.
어머니: 그럼 가서 테레비나 봐.
정은: 싫어.
정은, 서랍을 열며 내용물들을 뒤지기 시작한다.
어머니: 얘, 남의 서랍 왜 뒤지니?
정은: 엄마도 내 서랍 맨날 뒤지잖아?
수진, 정은을 보며 흐믓하게 웃는다. 수진의 어머니도 웃는다.
어머니: (수진의 여행가방 속에서 옷들을 꺼내며) 내일 뭐하니? 쇼핑갈까?
수진: 내일? 출근해.
어머니: 출근? 어디로?
수진: 같은 회사.
어머니: 안 그만 뒀어?
수진: (웃으며) 나 같은 인재 찾기 힘들잖아?
정은: (서랍에서 이것 저것 꺼내보며) 그럼, 유부남이랑 마주치겠네?
어머니: 정은아! 저 입을 그냥!
수진: 아니, 그럴 일 없어. 유부남은... 사라졌어.
정은: (빙글 돌아, 아주 궁금한 표정으로 수진을 응시하며) 어디로?
수진: (어머니에게) 아빠는?
어머니: 방에서 안 나오시는데...
수진, 꽃무늬 베개를 집어 향기를 맡으며, 지긋이 눈을 감는다. 눈가에 미소가 가득하다...
어머니: 그래도 집이 최고지?
8. 부엌 (수진 부모의 집) 아침
촉촉한 가을의 아침햇살... 카메라, 벽에 걸린 수진의 어릴 적 사진들과 가족사진을 훑다가 넓은 부엌을 소개한다. (부자집이다.) 식탁에 둘러 앉아 아침 식사를 하고 있는 수진과 수진의 가족들. 수진의 아버지, 어머니, 정은, 그리고 수진은 조용히 식사를 한다. 아무도 말을 하지 않는다. 아버지의 표정은 굳어있고, 모두들 그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밥을 먹는다. 적막 속에서 들리는 소리는 접시에 젓가락 닿는 소리뿐... 수진, 아버지를 곁눈질해보면 아버지는 그녀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조용히 식사만 한다. 수진과 어머니, 서로를 한번 쳐다본다.
식사를 다 마친 아버지, 근엄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난다. 수진의 뒤를 지나다가, 실수로 (또는 일부러) 팔꿈치로 수진의 뒤통수를 툭 친다. 갑자기 앞으로 밀리는 수진의 머리... 표정이 굳는다. 이때,
아버지: 어? 미안!
아버지는 부엌 밖으로 근엄하게 나간다. 어느새 수진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보인다. 어머니도 조용히 웃기 시작한다. 정은, 허탈하게 코방귀를 끼며, 입을 삐죽거린다.
정은: 말도 안돼. 이게 다야? 다리몽댕이 안 뿌러뜨려?!
수진: (주먹을 쥐며) 이게?
9. 패션회사 남성정장 기획팀 부서 아침
실내 디자인이 세련된 패션회사 사무실. 벽에는 거대한 남성복 광고 포스터 몇 장이 나란히 걸려있다. "Clothes Make the Man(옷이 날개)"라는 문구가 포스터 하단에 보이고... 어느 한 책상에서 수진이 책상 정리하는 모습이 보인다. 수진, 박스에서 책들과 서류를 꺼내다 이상한 느낌에 주위를 둘러보면 직원들 몇 명이 자기를 쳐다보고 있다. 근처에 서있던 차실장 영업부 실장이 수진에게 다가온다.
차실장: 자린 맘에 들어?
수진: 아, 네.
차실장: 수진씨처럼 페미닌하고 섬세한 사람이 남자 옷, 이거 괜찮겠어?
수진: 많이 도와주세요. 남성 정장은 처음이라서...
옆에서 여자목소리가 들린다.
여자목소리: (티꺼운 말투로) 꼭 뭐 만들어봐야 아나?
디자이너 같은 희한한 옷차림의 30대 여자가 등장한다.
여자: 왜? (위아래로 수진을 훑어보며 비꼬듯이) 남자 옷 자알 만들겠는데... 나 안나 정.
안나 정, 악수를 청한다.
수진: (악수하며) 안녕하세요. 잘 부탁 드리겠습니다. 김수진입니다.
안나 정: 반가워요. 얘기 많이 들었어요.
표정이 약간 굳어지며 의아해하는 수진에게:
안나 정: 김연숙 몰라요? 서용준실장 와이프, 내 대학 동기인데. 아, 맞아, 지금은 아니지.
수진, 더욱 표정이 불편해진다.
안나 정: 잠깐 따라와요. 오늘이 'Q.C. Q.C.: Quality Confirm!'야.
10. 의상 작업실 계속
정장 패턴의 광목원단을 몸에 걸친 완벽한 몸매의 남자모델... 몇몇의 여자 작업자들이 그를 가운데 세우고 부지런히 핀을 꽂으며 가봉작업을 하고있다. 남자모델, 작업자들 지시에 따라 움직일 때, 하얀 박서(속옷)만 입고있는 맨살이 슬쩍 드러난다. 작업자들이 달라붙어있는 모습이 꼭 임금님 옷 만드는 것 같다...
안나 정은 남자모델 앞으로 간다. 수진도 작업현장을 슬쩍 둘러보며 서서히 모델 앞으로 다가간다.
안나 정: (작업자들에게) 비켜봐.
작업자들, 긴장한 표정으로 뒤로 물러선다. 안나 정, 모델이 입고있는 옷을 잠시 바라보다가:
안나 정: (멋있게) 핀.
안나 정의 바로 옆에 불안한 표정으로 서있던 작업자1, 자기 손목에 찬 핀봉을 안나 정 앞으로 올려 든다. 핀봉에서 핀 하나를 집어 빼는 안나 정, 재킷의 어깨 선을 고쳐 꼽기 시작한다. 그녀의 손놀림, 자신감에 넘친다. 작업자1, 핀봉을 맨 손목을 내리려고 하자,
안나 정: 들고있어. (양복의 컬러(collar) 부분을 만지며) 라펠이 너무 넓잖아? 양쪽으로 3mm 줄여. 샘플 팀은 시키는대로 하면 어디 뿔나나? 엉?
다들 조용히 듣고만 있다. 약간 긴장감이 도는 작업실...
안나 정: 이거 B안이지? C안으로 갈아 입혀봐.
남자모델, 윗도리를 벗고 다른 옷으로 갈아입는 동안,
안나 정: 오늘 새로 온 사람한테 할 얘긴 아니지만, 이 아이템도 안 먹히면 브랜드를 아예 접는다는데. (걱정어린 어조로) 김 팀장은 뭐 어디 오라는 데 없어?
수진, 별로 새겨듣지 않으며 자신 있게 모델이 벗은 'B안'의 재킷을 들어본다. 그리고, 옷감을 만져보다가 다른 손에 들고있던 기획서류파일(소재가 붙어있는 견본서류 파일)을 펼치며 옷감을 자세히 비교하기 시작한다.
안나 정: (모델의 단추를 풀며) 셔츠를 좀 풀어볼까? 섹시하게... 우와, 이 가슴 근육 좀 봐. 죽인다, 너. 서실장도 처음 들어왔을 때에는 이런 거 직접 다 했었는데...
수진: (옷감을 만지며) 이 감으로 가는 건가요?
안나 정, 고개를 느리게 돌려 수진을 띠꺼운 표정으로 노려본다. 눈이 일순 마주치는 수진과 안나 정... (마음속으로 무엇이 오가는 것일까?)
11. 아이스크림 가게 낮
수진의 표정, 심각하다.
수진: (나지막이) 난... 내 감정에 충실했었구... 후회 없어. 그게 뭐 죄야? 엉?
여자 목소리: 누가 뭐래?
카메라, 빠지면 카페처럼 꾸며놓은 아이스크림 가게 안이 보인다. 수진과 그녀의 친구들(윤아, 지현, 명주)이 창가 테이블에 모여 앉아 아이스크림을 맛있게 먹고있다. (아이스크림 가게 안은 교복을 입은 남녀 중고등학생들로 가득하다.)
윤아: (계속/수진에게) ...너 원래 좀 대책 없잖아? 그거 자랑 아니다.
지현: 그래, 맞아. 연애도 전략이 있어야 돼.
수진: 전략?
윤아: 야, 요즘은 여중생들도 가출할 때는 이쁜 애 끼고 나간다더라.
수진: 그게 무슨 소리야?
윤아: 너 없는 동안 우리 설움 많았다. 이제 같이 좀 놀자. 기집애.
수진, 피식 웃다가, 갑자기 시무룩해진다. 그러다 멍하니 아이스크림을 먹기 시작한다. 다시 넋을 잃고 뭔가 생각하는 표정... 순간 친구들 모두 수진을 안쓰러운 표정으로 쳐다본다. 이때, 여자의 하얀 손 갑자기 수진의 두 눈을 가린다.
프랑스 여자: (목소리만) Bon apr s-midi!
약간 놀라는 수진, 돌아보면 예쁜 프랑스 여자가 수진에게 미소 짓고있다. 그러나 수진은 여자를 못 알아본 듯한 표정이다... 불안한 눈초리로 친구들을 돌아본다.
윤아: (의아한 표정으로) 이사벨! 우리 불어선생. 못 본지 얼마나 됐다고 까먹냐?
'아!'하는 표정을 짓는 수진, 곧 어색하게 미소 짓는다.
수진: Isabelle?
이사벨: Oui.
지현, 수진 옆에 자리를 만들어주면, 이사벨 의자에 앉으며.
이사벨: Dos bienvenu. ['돌아온걸 환영해요.']
수진: (우물쭈물 답변을 생각하다가...) Merci beaucoup. ['고맙습니다.']
이사벨: (모두를 둘러보며) Commen ons. ['시작할까요?']
모두들 작은 불어책을 각자의 가방에서 꺼내는 동안:
윤아: Isabelle! Je suis tr s solitaire. Tr s... tr s solitaire. ['이사벨! 나는 너무 너무 외로워요.']
이사벨: (웃으며) M'aussi! ['나두요!']
지현: M'aussi.
명주: M'aussi.
모두: 하하하...
농담이 오고 가는 동안, 자기 가방 안을 뒤지던 수진, 불어책은 안보이고 열쇠하나를 발견한다. 열쇠를 꺼내는 수진, 다시 표정이 멍해진다...
12. 어느 고급 아파트 오후
열쇠구멍에 꽂히는 방금 전의 열쇠... 그리고 열리는 아파트 문... 수진이 아파트 안으로 들어온다. 문을 닫는데 거미줄이 손에 잡힌다. 거미줄을 벽에 문지르며 아파트 안을 보는 수진, 그 동안 아무도 살지 않았던 것 같다. 바닥에는 먼지가 잔뜩 깔려있고, 부엌에는 식기들이 온통 다 깨져 있다. 수진은 준비해온 큰 더플백을 마루바닥에다 놓고 자기 소지품들을 주워담기 시작한다.
옷장에서 나오는 그녀의 옷들... 베개, 슬리퍼, 인형... 애인으로 보이는 남자(서용준)와 함께 찍은 사진(액자의 유리가 깨져있다)... 테이블 위에 있는 화장품들... 화장실 안에 칫솔, 샴푸 등등...
소파에 긴 머리카락이 한 주먹 흩어져있다. 수진, 가만히 흩어진 머리카락들을 바라본다... 과거회상에 잠기는 듯 한 표정... 뭔가 불쾌한 일을 겪었는지 안색이 창백해진다. 눈가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한다... 더플백 안에서 깨진 사진을 다시 꺼내는 수진... 사진을 한참 바라본다... 계속해서 흐르는 눈물을 연신 훔치면서 짐을 정리하는 수진.
[CUT TO: 아파트 복도]
다시 열리는 아파트 문. 수진이 두툼해진 더플백을 어깨에 메고 밖으로 나온다. 문을 잠그고 열쇠를 문 밑 우유구멍으로 집어넣는다.
13. 도심거리 계속
택시 정류장에 앉아있는 수진, 표정이 멍하다. 더플백이 그녀가 앉은 벤치 옆에 놓여있다. 곧 택시 한대가 나타난다. 수진, 택시에 서둘러 올라탄다. 하지만 더플백은 그대로 벤치 옆에 놓여있다. 택시는 떠난다. (깜빡 잊은 걸까? 아니면 일부러 그런 걸까?)
택시 안의 수진은 여전히 무표정... 창 밖을 무심코 내다보기만 한다.
[INSERT:] 창 밖을 내다보는 수진의 시점에서... 화창한 가을날에 느닷없이 하얀 눈(!)이 내리다가... 카메라, ECU로 내리는 눈 사이로 가까이 들어가다, 다시 빠지면 하얀 벚꽃들... 화창한 봄날이다... (두 계절이 한 순간에 지나간 느낌.)
14. 시내도로 오후 (봄)
나무에 벚꽃들이 많이 피어있는 거리를 달리는 자동차 안. 수진의 손에 작은 사진 한 장이 쥐어져 있다. 뚱뚱한 남자가 경직된 미소를 짓고 있는 증명 사진이다. 남자의 표정이 우습다. 수진, 보고있던 사진을 옆에서 운전하고 있던 아버지의 가슴주머니에 집어넣는다. 수진은 날씨에 걸맞게 예쁘게 차려 입었다.
아버지: 듬직하지?
수진: (미소 지으며) 너무 듬직해요. 너무 부자고...
아버지: 살 좀 빼라고 할까?
수진, 말없이 웃는다.
아버지: 언제 만날래?
수진: 아빠~~
아버지: 그럼 어디 가서 하나 만들어 오든지! 우읍~~
수진, 어린아이처럼 아버지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는다. 두 사람, 잠시 조용하다가... 수진이 다시 창 밖을 보며 얘기한다.
수진: 아빠는 내가 밉지 않아요?
아버지: ...
수진: 요즘 동창회도 못 나가시잖아요? 나 때문에 경찰서까지 들락거리구...
아버지: (시침을 떼며) 어, 그런 일이 있었나?
수진: (눈을 흘기며) 어?
아버지: 잘 잊어버리는 것도 재주다. 그러니까, 옛날 실수는 다 잊어버리고 좋은 사람 만나서...
아버지, 웃으며 셔츠 주머니에서 증명사진을 다시 꺼내려는데...
수진: (말을 자르며 약간 애교있게) 아빠!
[CUT-TO:]
도로를 달리던 아버지의 자동차, 레미콘 트럭들이 즐비하게 세워져 있는 어느 공사장 앞에 도착한다.
아버지: 잠깐이면 되는데. 같이 갈래?
수진: 갔다 오세요.(인상을 찌푸리며)어우, 저 먼지!...
아버지, 차 밖으로 나간다. 수진, 라디오를 켠다.
15. 공사장 계속
차 안에 음악 라틴 음악이 흐르고. 수진은 음악을 들으며 창 밖의 아버지를 바라본다... 아버지는 먼지가 소용돌이치는 공사장 쪽으로 뚜벅뚜벅 걸어가고있다 이때, 노가다들 갑자기 일하는 속도가 빨라진다. 왜?. 수진, 아버지의 뒷모습을 지긋이 바라본다. 눈물이 약간 글썽... 수진은 뚱뚱한 남자의 증명사진을 다시 한번 본다... 수진이 다시 창 밖을 보면, 공사장 인부들이 아버지에게 공손하게 인사하는 모습이 보인다. 노가다1이 아버지에게 다가오며 공손히 현장 헬멧을 건넨다. 아버지가 헬멧을 쓰며 노가다1에게 뭐라고 말하자, 노가다1은 아버지를 이끌고, 분주히 움직이는 다른 노가다들을 지나, 2 정도밖에 세워지지 않은 건축물 안으로 향한다.
수진, 아버지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공사장 옆을 본다. 줄지어 세워져있는 레미콘 트럭들 근처에는 트럭 운전수들이 모여 서서 담배를 피우며 잡담하고 있다.
한편, 아버지는1층에 세워진 임시 컬럼들을 지나, 2층으로 올라간다 Steadycam Shot. 곧 누군가의 고함소리가 크게 들려온다. 아버지와 인부는 말다툼이 벌어지는 곳으로 다가간다. 양복차림의 50대 남자(박전무)가 헬멧을 쓰고있는 젊은이에게 호통치고있다. (젊은이는 뒷모습이라 누군지 알 수 없다.)
박전무: 아, 그럼 어떡하자는 거야~! 차 다 와서 기다리는데 지금 안 부으면 얘네들 그냥 돌려보네? 아! 새끼, 진짜 개념 없네 이거!
박전무, 수진의 아버지(이하 김사장)를 발견하는 순간, 90도 각도로 고개 숙여 인사한다. 이때, 젊은이가 뒤를 돌아보는데, 그의 얼굴이 드디어 드러난다. 젊은이는 다름아닌 철수 편의점에서 수진과 마주친 남자! 철수도 김사장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한다. 철수, 여전히 헝클어진 외모다. 헬멧 아래로 돼지털처럼 삐져나온 머리카락과 턱수염에는 여전히 톱밥이 붙어있다. 그러나 그의 표정, 좀 심각하다.
김사장: 무슨 일 있나?
박전무: (흥분해서 말을 더듬으며) 아니 사장님! 오늘 저 공구리 다 부어 부어야 되는데~! 아 이노무 새끼가 한 시간 전부터 자꾸 못 붓게 하잖아요~!
박전무, 철수를 흘겨본다.
박전무: 야, 야! 너 저~ 저대로 돌려보내면 너 얼마 까먹는지 알어?
철수, 박전무를 똑 같이 노려보며:
철수: 그래요, 한번 부어보쇼, 예? 얼마나 까먹는지 한번 봅시다. 부어놓고 나서 한번 보자니까, 씨부랄!
박전무: 뭐? '씨부랄'? 이 새끼가 그냥 확!
철수, 헬멧을 벗어 던지며 계단쪽으로 향하며 말한다.
철수: (낮은 목소리로) 에이 씨발! 진짜 귓구멍에 말뚝 박아논 것도 아니고 씨발! 아침부터 그렇~게 얘기해도 안들어 처먹더니... 왜 엄한 사람한테 삽질이야! 삽질은? 씨발, 애으~!
박전무: (철수의 뒷통수에) 아! 저 미친 새끼! 뭐 저런 새끼가 다 있냐? 와~!
김사장: (철수에게) 이봐 저 최소장!
걸음을 멈추는 철수, 김사장을 돌아본다. 몹시 아니꼬운 표정.
김사장: 자네, 아~ 자네 이름이 뭐였지?
철수: 사장님 서른번째입니다. 최철수입니다. 최~철~수.
김사장: 허허. 미안해. 최소장, 문제가 뭔가?
철수: 문제요?
(박전무를 잠시 노려보다가)
지금 이 상태선요. 거푸집이 너무 약해서 공구리를 못 받친다니까요, 글쎄. 지난 주에 비 좀 많이 왔습니까? 아시바도 제대로 못 세웠는데, 아, 근데 지금 붓는다구요? 붓다가 자빠져도 작살날 판인데, 사람 다 들어가 살다가 우르르 폭삭하면? 어쩌실 겁니까?
김사장: (걷기 시작하며) 내가 한 번 볼까?
철수: (앞장서며) 사장님도 한 번 보세요. 오늘 이거 노가다, 장비들 다 풀가동해도 내일 아침까지 안 끝납니다. 그리고 요즘 오바타임이 얼마인지 아십니까? 차라리 말 잘해서 내일모레 다시 오라고 하는게 훨씬 날 겁니다.
김사장, 말없이 현장을 돌아다니며 기둥을 발로 차기도 하고 손으로 표면을 문질러보기도 한다. 박전무, 안절부절하며 김사장의 뒤를 따르고 철수, 불만에 가득찬 눈으로 김사장을 쳐다본다.
박전무: (사장을 향해) 아, 톱질하던 놈이 뭘 안다고 저렇게 떠드는지 모르겠습니다. (철수 쪽을 향해) 아니, 멀쩡한 공구리가 왜 무너져?
철수: (헬멧을 다시 주워 쓰며) 사장님, 제가 노가다 생활 하루이틀 하는 것도 아니고... 지금 부으면 무조건 무너집니다. 9시 뉴스에 나오고 싶으십니까?
김사장: (웃으며) 글쎄. 뉴스에 나오면 안되겠지? 하여튼 알았어. 최소장.
철수, 인사도 하지 않은 채 철제계단을 내려간다. 내려가는 철수를 김사장이 쳐다본다.
계단을 내려와 1층을 지나던, 철수, 구석에서 일 안하고 설렁거리는 노가다 몇 명을 발견하고는...
철수: (큰소리로) 어이, 뺀질이들! 고스톱 치러 나왔냐? 니들 오늘 참 없다! 알았지?
한편, 김사장과 박전무, 2층 난간에 서서 공사장 밖으로 뚜벅뚜벅 걸어나가는 철수를 내려다본다. 주변엔 레미콘 트럭들이 보인다. "구~우~웅..." 시멘트 탱크들이 여전히 느리게 돌고있다...
김사장: (기둥의 표면을 만지며, 너무 무겁지 않게) 박전무, 무리할 건 없잖아?
박전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숙인다.
[공사현장 밖:]
한편, 철수는 공사장 근처 거리를 어슬렁거리며 나오며 담배를 문다. 라이터로 담뱃불을 부치며 걷는 순간, 수진이 앉아있는 김사장의 차를 지나친다. 마침 고개를 숙이고 라디오 채널을 돌리고있던 수진, 인기척에 고개를 든다. 철수를 보는 수진, 갑자기 어렴풋한 기억에 사로잡힌다. '어디선가?...'
철수가 수진을 지나 레미콘 트럭들쪽으로 향하는데, 수진은 철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다. 철수, 트럭 옆에 가만히 기대어 서서 담배를 피운다... 수진, 계속 그를 바라보며 기억을 더듬는다. 순간, 김사장이 차 안으로 들어온다. 아버지의 표정이 경직되어있다.
[김사장 자동차 쪽에선:]
수진: (김사장 표정을 살피며) 무슨 일 있어요?
김사장: 젊은 놈이 승질 있네!
수진: 누구요?
김사장: (차를 출발시키며) 우리 뭐 먹기로 했지?
느리게 움직이는 김사장의 차가 철수를 지나칠 찰나, 멀리서 나이든 레미콘 운전수1이 핸드폰을 접으며 철수에게 외친다.
레미콘 운전수1: 어이 십장! 낼모레 보자구!
철수, 고개 돌려 무표정하게 레미콘 운전수1을 바라보는 순간, 김사장의 차는 철수를 지나치고, 철수는 수진을 보지 못하지만, 수진은 철수를 또 다시 본다. 먼지를 뒤집어쓴 지친 얼굴과 그 산적 같은 턱수염... 차 뒷유리창으로 철수를 계속 보는 수진, 얼굴에 궁금증이 가득하다. '누굴까?...' 미간에 주름이 깊어지는데...
김사장: (목소리만) 뭐야? 왜 그래?
대답 없는수진, 다시 앞으로 앉는다. 아직도 풀리지않는 미스터리... 고개를 갸우뚱... '누굴까?'
[레미콘 쪽:]
한편, 철수는 옆에 서있던 젊은 레미콘 운전수2에게 말한다.
철수: (레미콘 운전수1을 보며) 저 새끼는, 십장 아니래니깐, 씨!
레미콘 운전수2: 우리 사장님이래니깐! '저새끼' 아니래니깐! 형은 진짜...
순간 철수, 레미콘 운전수2에게 손을 번쩍 들어 때리려는 시늉을 한다. 레미콘 운전수2, 빠르게 피하며 트럭에 올라탄다. 레미콘 트럭들, 곧 줄지어 출발한다. 하늘의 붉은 노을이 아름답다...
[INSERT:] 도시의 거리, 어두워지다가 해가 뜨며 밝아진다 Time-lapse Photography...
16. 기성복 전시장 (수진의 의류회사 빌딩) 아침
넓고 세련된 기성복전시장에 멍하니 서있는 차실장, 옆에 수진 수진의 손에는 볼펜이 쥐어져 있다. 다른 손에는 견본파일.이 둘러보며 서있다... 한쪽 벽의 벽지 전체가 뜯겨져 나가있다.
수진: 여기 서둘러야 되지 않아요?
차실장: 망했다. 망했어. 난 이제 대기발령이다... 그 자식 잡기만 해봐라! 친구라고 억지로 연결시켜놨더니 부도를 내고 내빼? (얼굴이 일그러지며) 아~ 예산도 다 땡겨 줬는데...
수진: (잠시 생각에 잠기다가) 제가 한번 알아볼게요. 방법이 있을 수도 있어요.
차실장: 그래? (표정이 환해지다가) 저 김팀장.
수진: 예?
차실장: (손가락을 입에 대며) 비밀이야. 알지?
고개를 끄덕이는 수진, 생각에 잠긴다. 차실장, 밖으로 향하려고 움직이는데:
수진: (조용히) 저 실장님...
차실장: 응. 왜?
수진: 혹시... 분명 아는 사람인데 생각 안 날 때 있죠?
차실장: 응. 그럼.
수진: 그땐... 어떡하죠?
차실장: 뭘?
수진: 아니에요.
17. 사무실 (수진의 의류회사) - 늦은 오후
'부우웅...' 복사기에서 새어 나오는 강렬한 불빛, 수진의 얼굴을 밝힌다. 수진, 뭔가 곰곰이 생각하는 표정... (이때 들리는 수진과 김사장의 전화통화...)
수진: (목소리만) 아빠, 진짜 그래주실 수 있어요?
김사장: (목소리만) 그럼, 당연하지! 아빠가 너 봉 아니냐?
복사가 끝나는 소리와 함께 서류를 들고 기획실로 향하는 수진, 계속해서 '누굴까?'라는 의문의 표정으로 복도를 걷는다. 중얼중얼, 입가엔 '누구지?'란 말이 읽혀질 정도다.
수진: (목소리만) 아빠가 왜 봉이에요. 산타클로스지!
김사장: (목소리만) 됐다... 사람 하나 보낼 테니까, 가급적이면 남자 직원들이 상대하라 그래, 알았지? 걔 험하다. 아주 사나운 애야...
사무실로 들어선 수진은 책상에 서류를 올려놓고, 그 뒤로 차실장이 핸드폰 통화하는 것이 보인다.
차실장: 수진씨.
수진, 차실장을 보면, 눈짓하는 차실장. 다시 복도로 나서는 수진. 뒤를 따르는 차실장.
차실장: (목소리 작게) 올라오고 있어.
수진과 차실장, 엘리베이터 앞에 서는 순간. '팅'하고 열리는 엘리베이터 문... 엘리베이터 안에 철수가 서있는 모습이 수진의 눈에 들어온다. (순간 스치는 편의점 앞의 철수의 모습과 교차하며.) 수진, '어?'하는 표정과 함께 눈이 커진다... 드디어 기억이 났다.
그 지저분한 턱수염... 철수도 수진을 보지만 얼굴색이 변하지 않는다. 자신도 모르게 차실장 뒤로 숨듯 물러서는 수진, 서서히 뒤로 돈다. 한편 차실장은 엘리베이터에서 걸어 나오는 철수에게 악수를 청한다.
차실장: 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우선 잠시 제방에서 커피한잔 하시겠...
철수: 현장이 어디에요?
자기 책상으로 향하던 수진, 철수의 목소리를 듣는다. 철수의 퉁명스런 공사판 억양이 매력적이다. 책상 앞에 서는 수진, 뒤를 서서히 돌아보면, 엘리베이터 앞에는 아무도 없다. 그는 수진을 기억하고 있을까?
18. 기성복 전시장 (수진의 의류회사 빌딩) 계속
살금살금... 기성복 전시장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수진, 좀 긴장한 모습이다. 철수의 뒷모습이 곧 시야에 들어온다. 철수는 한쪽 구석에 카우보이처럼 멋지게 웅크린 채로 줄자를 가지고 치수를 재고있다. 그 옆에는 차실장이 가만히 지켜보고 서있다. 철수, 곧 일어서더니 주머니에 있던 작은 노트를 꺼내 뭔가를 기록한다. 다른 구석으로 가서 벽의 표면을 관찰하는 철수...
철수의 모습을 관찰하던 수진, 자기도 모르게 몽롱해지기 시작한다. 수진은 철수에게 끌려가듯 걸어간다. 차츰 거리가 가까워지기 시작한다. 계속 벽을 보고 치수를 재며 노트에 기록을 하고있는 철수, 줄자 다루는 모습도 멋있다. 다시 다리를 웅크리고 팔을 뻗는데 야성적으로 갈라진 삼두근과 날개근육이 불쑥 튀어나온다. 수진, 철수의 뒷모습을 계속 응시한다. 철수, 이때 수진의 시선을 느꼈는지, 갑자기 고개를 돌려 수진을 본다. 깜짝 놀라는 수진. 움직이지 못한다. 철수, 수진에게 슬쩍 미소를 보내며, 줄자를 돌려 감는다. '끽끽... 끽끽...' 줄자 돌아가는 소리만 요란하게 들린다. (그는 수진을 기억하나?)
19. 회사 복도 계속
음료수 자판기 앞에 서는 수진, 동전을 넣고는 자판기 음료수 버튼들을 살펴본다. 약간 초조한 기색... 그러다가, 순간 왜 왔는지 목적을 잊은 듯, 멍하니 서 있는다. 이때, 갑자기 수진의 머리 옆으로 철수의 손이 지나간다.
수진: 아악!
화들짝 놀라는 수진. 그 손은 순식간에 수진의 얼굴 바로 앞에 위치한 콜라버튼을 누른다. 순간, 콜라가 '콰당' 소리와 함께 밑으로 나온다. 옆으로 비켜서며 콜라를 집는 철수, 태연하게 뚜껑을 따서 꿀꺽꿀꺽 들이킨다. 수진은 멍하니 철수를 지켜본다. 철수, 콜라를 다 마시자 빈 캔을 수진에게 돌려주며 거세게 트림을 한다. '거어~ 어억!~' 소리가 아주 크고 길다. 웃음을 참으며 입을 막는 수진. 얼굴이 금세 환해진다.
철수: 오랜만이에요.
20. 회사 근처 거리 초저녁
해가 지고 퇴근길... 예쁜 핸드백을 메고 있는 수진, 구멍가게 앞에서 누구를 기다리고있다. 철수가 구멍가게에서 담배 한 갑을 까며 나온다. 한적한 거리를 나란히 걷는 두 사람...
철수: 걸어가세요?
수진: 예? 아니요. 예. 저기 버스...
고개를 끄덕이는 철수, 살짝 미소 짓더니, 담배를 물며 근처에 세워진 자신의 낡은 차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수진, 약간 시무룩해진 표정으로 조금 걷다가, 무심코 택시를 잡으려 길가로 나선다. 이때, 들려오는 오토바이 소리...
[INSERT:] '부르릉!' 신호대기상태의 오토바이. 클러치를 움직이는 남자의 손과 발이 연달아 보이고, 카메라 빠르게 빠지면, 퀵써비스 오토바이가 보인다.
이때, 수진은 길가에 서서 멀리 서있는 택시를 향해 손을 흔든다. 한편, 철수는 차에 올라타면서 오토바이 소리를 듣자 표정이 좀 불길해지기 시작한다.
[INSERT:] 신호가 바뀌기 직전... 퀵써비스 오토바이 바로 옆으로 검정색 오토바이 한대가 선다. 왠지 수상하다... 이때 마침 신호가 바뀐다.
쏜살같이 출발하는 검정색 오토바이. 택시가 수진에게 다가오는 것을 앞지르며 수진의 핸드백을 순식간에 낚아챈다.
수진: 아악!
이때, 차 안에서 사이드 미러로 뒤를 본 철수, 오토바이가 그를 지나치기 직전, 태연하게 차문을 연다. 문짝이 앞으로 꺾이며 날아가고, '꽈당!' 오토바이는 옆으로 미끄러지고, 날치기는 공중으로 튀어올라 몇 바퀴 빙글빙글 돌다가 개구리처럼 '파다닥!' 콘크리트바닥에 떨어진다. 그 충격으로 앞유리에 거미줄처럼 줄이 간다.
철수, 차 밖으로 태연하게 걸어 나온다. 근처에 떨어져있는 수진의 핸드백을 줍는데, 가방 끈 한쪽이 끊어지며 가방이 거꾸로 쏠린다. 그러면서 가방 안의 내용물이 줄줄이 떨어진다. 다른 내용물과 함께 떨어지는 볼펜, 약 스무 개 정도 된다. 약간 놀라는 철수, 땅바닥에 구르는 펜들을 줍는다. 옆에 달려온 수진, 흩어진 자기 소지품들을 주워담는다.
철수: 괜찮아요?
수진: 예.
철수: (볼펜 뭉치를 양손에 쥐고) 전철에서 물건 팔아요?
수진: (놀라며) 여기 다 있었네? 제가 볼펜을 잘 잃어버려서...
철수, 수진에게 볼펜무더기를 건네주고는, 날치기가 뻗어있는 쪽으로 걸어간다. '大'자로 쓰러져있는 날치기, '뚜벅뚜벅' 철수의 발소리를 듣자, 낑낑대며 일어난다. 미소 짓는 철수, 날치기에게 천천히 다가간다. 윗몸을 겨우 일으킨 날치기, 아픈 목을 억지로 돌려 철수를 본다. (이때, 목에서 '뚜드득!' 소리가 난다.) 철수는 날치기에게 점점 가까워진다. 날치기, 신음하며 겨우 일어선다. 그리고는 도망치기 시작한다. 절뚝거리며 누가 발 거는 사람도 없는데 자꾸 넘어지며 어설프게 전력질주하는 날치기를 바라보는 철수... 피식 웃는다.
수진: 괜찮을까요?
철수, 돌아보면 수진이 등뒤에 숨듯이 서있다.
철수: 뭐가요?
수진: 저 사람요.
철수: 잘만 뛰는데 뭘...
수진, 철수의 말에 웃음이 나온다. 철수와 수진, '빵빵!' 경적소리에 거리를 문득 보면, 차에 탄 어느 외국인이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지나간다. 수진, 철수를 보며 웃는다. 철수, 이때 턱짓으로 길 건너편을 가리킨다. 수진, 가리키는 쪽을 돌아보면 현수막 하나가 보인다.
"오토바이 날치기를 조심합시다."
강남경찰서
수진, 다시 철수를 본다.
철수: (핸드백을 보면서) 괜찮죠? 뻔히 눈 뜨고 콜라 날치기 당해본 사람도 있는데.
수진: (눈을 약간 흘기며 애교스럽게) 아니, 그걸 아직도 기억하세요?
피식, 미소 짓는 수진.
[CUT-TO:]
'퉁' 소리와 함께 열리는 트렁크... 수진은 트렁크 안을 보고 놀란다. 공구와 연장이 가득하다. 가장 놀라운 것은 모든 것이 가지런히 정리되어있는 것이다. 철수의 헝클어진 머리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야구방망이도 서너개 정도 보인다. 철수는 렌치 하나를 집어 들더니, 끊어진 가방 끈을 금세 연결시킨다. 수진은 그의 정교하고 빠른 손놀림에 약간 놀란다. 철수는 곧장 수진에게 가방을 돌려준다. 신기해 하는 수진, 가방을 어깨에 매본다. 그리고 한번 당겨본다.
수진: 고맙습니다.
철수, 곧 트렁크 구석에서 긴 장도리와 큰 렌치를 꺼낸다.
[CUT-TO:]
보도에 놓여진 깨진 유리창... 차 천정 위에 올려져 밧줄로 고정된 운전석 차문... 나란히 서서 뻥 뚫린 운전석을 들여다보는 두 사람... 철수, 곧 수진에게 (그의 특유의 짧은) 목례 뭔가 긍정적 확인의 목례...를 한다. 잘 가라는 의미인가? 그러나 수진은 가만히 서 있는다. 멀쭘해지는 분위기...
철수: 가세요.
수진: 예? 예...
철수, 운전석에 앉는다. 차문이 없어 허전하다.
수진: 저... 차문 고치시려면... 돈이... 들텐데...
철수: (시동을 켜고 무의식 중에 없는 옆 문을 닫으려 하다가 피식 웃으며) 뭐 차문 잠겨서 고생할 일은 없겠네요.
철수, 여전히 서있는 수진을 빤히 쳐다보다가 운전석 밖으로 나오며 말한다.
철수: 타요. 집에 데려다 줄 테니까.
수진, 표정이 약간 밝아지며 조수석을 향해 돌아가려는데,
철수: 어이, 밧줄 땜에 안 열려요. 일루 들어가요.
수진, 철수를 돌아보면, 운전석 쪽으로 들어가라는 손짓을 하고있다. 운전석 옆에서 차 안을 다시 한번 들여다보는 수진, 조수석쪽에 긴 연장들과 목재들이 많이 쌓여있다. 수진, 입고있는 치마의 단을 가지런히 잡고 차 안으로 기어들어간다. 삐죽삐죽 튀어나온 연장들 때문에 우아하게 기어들어 가지 못하는 수진, 조수석이 멀게만 느껴진다. 이때, 철수가 운전석에 올라타며 조심조심 기어가던 수진을 조수석쪽으로 살짝 민다. 수진, 급히 조수석에 다리를 불편하게 오므리고 앉는다. 수진이 신발을 벗으려는 찰라, 철수가 수진이 다리를 편안히 뻗을 수 있게 조수석의 거추장스러운 연장들을 우르르 잡아 빼는데... 치마가 연장에 걸려 올라간다. 치마를 급히 내리는 수진, 순간 못 본척하는 철수... 두 사람, 눈이 마주치며 분위기가 약간 묘해진다... (두근두근...)
철수: 이거, 그냥 붙잡고 가요. 편하게.
긴 연장 두 자루를 수진 손에 쥐어주는 철수, 기어를 바꾸며 차를 빠르게 출발시킨다. 한편, 수진은 연장들 사이로 다리를 조심스레 뻗으며 두 연장을 양손에 쥐고, 얼굴을 그사이에 내민다. 이때, 차가 언덕을 넘으며 흔들린다. '쿵탕'하며 양 옆의 연장에 머리를 부딪히는 수진, 아픔에 얼굴을 찡그리며 철수를 본다. 철수는 그냥 운전만 하고있다. 차 안으로 불어오는 강한 바람에 두 사람의 머리카락이 날린다...
21. 강변도로 밤
강변도로를 빠르게 달리는 철수의 낡은 차. (옆에 달리던 차들이 신기하게 구경한다.) 철수의 차, 뚫린 구멍들을 통해 안으로 바람이 세차게 불어온다. 소용돌이치는 바람 속에서 수진은 헝클어지는 머리를 잡으며 허우적댄다. 이때, 수진의 핸드폰이 울린다. 수진, 전화를 받으면,
윤아: (큰 목소리로) 야! 너 죽을래! 빨리 와! 너 땜에 숫자가 안 맞잖아! 안 오면 죽는다!
수진: (태연하게) 응~, 그래. 잘자! 응~~
아예 핸드폰의 전원을 완전히 꺼버리는 수진, 철수를 보면 운전만 계속하고 있다. 수진, 자꾸 헝클어지는 머리를 손으로 빗으며,
수진: (큰소리로) 야구방망이는 어따 쓰시는 거예요? (귀엽게) 사람 패세요? (철수 길을 살피며 대답이 없자) 사람을 왜 패요? (운전만 하는 철수) 미안해요.
철수: 뭐가요?
수진: 콜라 날치기... 제가 원래 그게 좀 심해요. 그거... 그... 뭐냐 그거... 건망증. 어쨌든... 근데 나 어떻게 기억했어요?
철수: (한참 대답이 없다가) 이 길로 빠지는 건가?
라고 말하면서 급하게 커브를 돈다. '웅당탕'하며 마구 흔들리는 조수석의 연장과 목재들 수진의 머리와 어깨에 부딪힌다. 수진, '욱!'하며 아픔을 참는다.
[CUT-TO:]
강변도로를 빠르게 빠져 나와 어느 깨끗한 거리로 진입하는 철수의 차, 이때 한 도로공사 현장을 지나게 된다. 연기가 자욱한 지점을 지나는데 차 안으로 연기가 가득 메워진다. 마치 짙은 안개 속에 있는 느낌이다 SLOW-MOTION으로 묘사... 약간 초현실적인 느낌. 딴 세상 또는 꿈속에 있는 것 같다... 수진, 약간 긴장한 표정으로 철수 쪽을 보면, 연기가 점차 개이며, 철수의 눈이 보인다. 철수도 수진을 보고있다. 철수, 수진과 눈이 마주치자, 순간 앞을 보며 운전을 계속 한다...
22. 부유한 주택가 계속
거대한 저택들이 즐비한 미로 같은 골목들을 지그재그로 도는 철수의 차...
철수: 이 동네 사는 거 맞아요?
수진: (웃으며) 아, 미치겠네! 내가 왜 이러지? 잠깐! 여기 우회전!
철수, 오른쪽으로 급커브를 돌린다.
수진: (기가 막힌 듯) 아~~ 참... 어디지? 처음에 이상한 골목으로 들어오시는 바람에...
철수: (담배를 물며) 이 골목 벌써 세 번째 도는 겁니다.
철수, 갑자기 뭔가 깨달은 듯 의심스런 눈초리로 수진을 노려본다.
수진: 낮에만 다녀서 그래요! (초조하게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아! 여기다! 여기!
철수, 약간 놀라며 차를 급정거 시킨다. 다시 나무들 '쿠당탕!...' 수진은 몹시 아픈 표정을 짓는다. '아야!'
[CUT-TO:]
운전석쪽으로 다시 기어 나오는 수진, 곧 철수와 마주보고 선다. 철수, 운전석에 도로 앉는다. 목례를 하고는 차를 출발시킨다. 철수의 차 갑자기 멈추고 후진등이 들어오고, 다시 수진 옆으로 와 선다.
철수: 뭐 까먹은 거 없어요?
수진, 핸드백을 뒤져보고, 자기 몸도 더듬어본다. 수진, 철수에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핸드폰을 수진에게 건넨다. 수진, 겸연쩍은 미소를 짓는다.
철수: (퉁명스럽게) 집에다 전화해요. 집 앞에서 길 잃었다고.
수진, 터져 나오는 웃음에 입을 막는다. 철수, 또 다시 그 특이한 짧은 목례를 하더니 먼저 훌러덩 떠나버린다. 철수의 차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수진... 철수도 슬그머니 사이드미러로 수진의 모습을 본다. 수진, 집으로 들어가는 모습 보인다...
23. 수진의 회사, 화장실 아침
윤아: (목소리만) Je t'aime. Je t'aime. Je t'aime.
지현: (목소리만) 윤아야, 이제 그만 좀 할래? 아침에 치즈 먹었니?
윤아: Oui. (느끼하게) Je t'aime... Mon ch ri...
친구들 옆에서 거울을 보며 립스틱을 예쁘게 바르는 수진이 보인다. 그녀의 친구들도 화장을 고치고있다. 벽쪽에 서있던 윤아, 자기 치마를 야하게 치켜올리며 입고있던 섹시한 스타킹과 가터벨트, 그리고 (뒤로돌아) 티팬티를 살며시 보여준다. 늘 있던 일처럼, 모두 무반응이지만, 좀 한심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윤아: ...죽이지? (한숨을 크게 쉬며) 보여주고 댕길 수도 없고, 정말. 왜 이런 건 안에다 입는 거야?
지현: (수진에게) 너 오늘 누구 만나니? 또 혼자 건수 올리면 죽는다.
수진: (미소 지으며) 건수? 하여튼 간... 너희들은 모이기만 하면... 그것 좀 줘봐. (명주에게) 윤아야. 그거.
명주: 나 명주다. 뭐? 뭘 달라구?
수진: (턱짓하며) 그거. 아참, 고거. 그래, 고거!
명주: 뭐? 이거? 핸드폰? 브러시? 뭐?
수진: 브러시. (웃으며) Oui. La brosse. Merci.
수진이 웃으며 화장을 마무리 짓는데,
윤아: (한숨 쉬며) 좋겠다, 배신자는... 하, 어디 입술 부르트게 뽀뽀 함 해봤음 소원이 없겠다...
윤아, 눈을 지긋이 감으며, 거울에 키스를 한다. 거울에 립스틱자국이 예쁘게 남는다. 모두 키스자국을 조용히 응시한다...
지현: 야, 서울역 가면 남자 많대.
윤아: (진지한 표정으로) 그래?
지현: 담뱃값 갖고 가야 된대. 소주 한 병하고.
윤아: (진지하게) 좋아! 너가 갔다와서 꼬옥 얘기해 줘. 알았지?
지현: (진지하게) 아니, 니가 가. 티빤쓰는 니가 입었잖아?
오가는 시니컬한 농담에 익숙한 그녀들. 아무도 안 웃는다. 수진만 피식... 수진, 거울을 보며 이쪽저쪽 몸을 돌려 자기모습을 확인하고는, 화장실 밖으로 걸어나간다.
24. 기성복 전시장 (수진의 의류회사 빌딩) 계속
전시장 안으로 들어가는 수진, 기대감에 부푼 표정. 그런데 못 보던 노가다3명이 벌써 설치물들을 철거하고있다. 수진은 주위를 둘러보지만 철수가 보이지 안는다.
차실장: 누구 찾어?
수진: 예? 아뇨. 저... 그 사람은...
차실장: 그 키다리 털보? 현장일이 바빠서 못 왔대. 앞으로 밑에 사람들이 진행한다는데?
순간 실망하는 수진.
차실장: (계속) 수진씨 정말 고마워. 아버님 골프 치시지? 한 번 연락드릴게.
눈을 깜박거리는 수진, 자꾸 얼굴이 후끈거린다...
25. 공사장 해질 무렵
석양이 아름답게 불거지고... 느리게 돌고있는 레미콘 탱크 표면의 클로즈업이 보여지고... 시멘트가 간이 덕트를 따라 한참 흘러내려가다가... 거푸집 컬럼들 사이에 부어진다. 이때, 촘촘히 세워진 에이치 빔 사이로 철수의 얼굴이 보인다. 철수는 여전히 지저분한 모습. 몸과 얼굴에 시멘트가 묻어있다. 인부들과 일하는 모습, 여전히 쿨하다...
[CUT-TO:]
한편, 카메라가 먼지가 소용돌이 치는 공사장에서 [TILT-DOWN]하면 길가에 세워진 철수의 낡은 차가 보인다. 근처에 선글라스를 쓴 수진이 차를 응시하고 서있다. 운전석 차문은 철수의 말대로 고쳐져 있다. 앞 유리창도 고쳐져 있다.
수진, 곧 자기도 모르게 차쪽으로 다가간다. 그리고, 무심코 몸을 숙여 창안을 살핀다. 잘 안보여 선글라스를 벗는다. 차 안에 철수의 소지품들이 보인다. 라이터, 담배 갑, 지도, 나침반, 건축도구등등... 그리고, 조수석에는 여전히 연장과 목재들이 기대어져 있다.
이때, 노가다1이 그녀 옆에 다가와 선다. 수진은 그가 옆에 서있는 걸 느끼지 못하고 계속 안을 들여다보다가, 불현듯이 문을 한번 열어보려는데, 갑자기 옆에서:
노가다1: 뭐해요?
화들짝 놀라며 옆을 보는 수진, 노가다1을 보자마자, 주변에 뭔가 찾는 시늉을 어색하게 하다가, '씨익' 미소 짓는다. 그리고 뒤로 물러선다. 노가다1, 수진을 수상한 눈초리로 노려본다. 수진, 빠르게 걷기 시작하는 하는데, 공사장에서 철수와 노가다들이 우르르 나오고있다. 깜짝 놀라는 수진, 곧장 뒤로돌아 걷는다. 노가다1을 지나치며 다시 어색한 미소를 짓는 수진. 곧 레미콘 트럭들 사이에 몸을 숨기며 전화기를 든다.
윤아: (목소리) 여보세요? 야, 어디냐? 이게 무슨 소리야?
수진: 윤아야.
윤아: 아 시끄러! 너 뭐해?
수진: (웃으며) 너 서울역 안 갔어?
윤아: (살짝 언성을 높이며) 내가 서울역을 왜 가? 미쳤어? (언성을 낮추며) 어? 무슨 건수 있어?
수진: 건수?
수진, 환하게 미소 짓는다.
26. 포장마차가 있는 거리 (공사장 근처) 밤
어두운 골목 코너에 숨어 서있는 수진, 머리만 내밀고 어딘가를 살피고 있다. 그녀의 행동이 좀 귀엽다. 수진 뒤에는 윤아, 지현, 명주가 서있다. 모두 예쁘게 차려 입었다.
명주: 아, 오줌 매려~~
윤아: 뭐야~~! 야, 무슨 건수는커녕~
수진: 쉬! 가만있어봐. 이게 다 '전략'이야.
수진, 친구들을 이끌고 코너를 돌아 걷기 시작한다. 수진과 친구들, 야외 포장마차를 지나치는데 철수가 노가다들과 모여 앉아 소주를 마시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포장마차 안의 남자들 모두 수진 일당들을 주시한다. 그러나, 철수는 계속 얘기를 나누며 (심심풀이로) 손에든 나무조각을 스위스 군용 칼로 깎고있다... (무엇을 깎고있는 것일까?)
철수는 결국 지나가고있는 수진을 보지 못한다. 실망한 수진, 뒤로 돌아 포장마차를 다시 지난다. 영문을 모르는 수진의 친구들, 수진을 따라 움직인다. 철수, 결국 고개를 드는데, 수진과 눈이 마주친다.
수진, 가만히 서서 철수를 응시한다. 손에 쥔 나무조각을 주머니 속에 넣는 철수, 그냥 가만히 앉아 수진을 본다. 노가다와 수진 친구들, 의아하게 둘을 번갈아본다.
윤아: 뭐야? 아는 사람이야?
수진, 말없이 철수에게 걸어간다. 철수도 역시 말없이 미소만 짓는다. 철수 앞에 서는 수진, 가만히 서서 철수를 바라본다.
철수: 반갑네요. 요즘 장사는 잘되시나?
수진: 예?
철수: 볼펜. 많이 팔았냐구요.
수진: (웃으며) 아. 아니, 저, 이 동네 약속이 좀 있어서...
철수: 아, 예...
철수, 대답과 동시에 노가다들에게 눈짓을 하자 노가다들, 기다렸다는 듯이 의자4개를 번개처럼 갖다 놓는다 Bird's Eyeview. 부감샷..
[CUT-TO:]
원형 테이블에 둘러 앉은 노가다들과 수진 일행들... 노가다들은 신나게 웃고 있고, 수진의 친구들은 불편한 기색이다.
노가다1: .. 그러니까 그 남자가 하는 말이, "똥쌌어, 이년아!"
노가다 2,3: (크게) 크하하하!
명주: 어우, 드러워!
수진: 푸하하하! 하압!
수진, 크게 웃음이 터져 나오지만 입을 막으며 친구들의 눈치를 본다. 윤아, 화난 표정으로 수진을 노려보다가:
윤아: (교양있게) 저, 음담패설 좀 그만 하시겠어요?
노가다 1: 아니, 그게 왜 음담패설이요? 엉? 아무리 돈이 많아도 똥은 자기가 눠야 되는 거 아니오?
윤아: (화를 내며) 도대체 그게 무슨 소리예요? 제발 똥 얘기 좀 그만 하세욧. 아, 증말, 야, 수진아 가자!
윤아, 핸드백 들고 일어나려는데, 노가다 2가 갑자기 윤아를 붙잡아 앉힌다.
노가다2: 아, 왜 이래요? 미안해요. 앉아요.
노가다의 터프함에 놀라는 윤아. 질린 표정으로 입이 벌어진다. '어떻게 나한테? 너희들 봤지?'라는 표정으로 친구들을 둘러본다.
수진: 괜찮아요. 계속하세요. 얘들 더러운 얘기 무진장 좋아해요!
수진을 다시 노려보는 윤아(그리고 친구들), 몹시 화났다. 그런데, 이때 윤아는 수진 옆에 앉은 철수가 고개를 약간 돌린 채 수진을 지긋이 바라보는 모습을 발견한다.
윤아: (철수에게) 눈 좀 떼시죠? 얼굴 뚫어지겠네요.
모두 다 철수와 수진 쪽을 쳐다보면 수진, 윤아의 말을 이해 못했는지 주위를 살피다 철수와 눈이 마주친다. 순간 불꽃이 튄다.
윤아: 야, 김수진, 가자. 엉!
대답 없는 수진, 철수의 끊임없는 응시에 창피한 기색으로 고개를 앞으로 숙인다. 다시 흘겨보면 철수가 여전히 자기를 보고있다. 수진은 시선 둘 곳을 몰라 허둥댄다. 술자리 분위기 갑자기 이상해지고, 머쓱해진 노가다와 수진의 친구들은 수진과 철수를 번갈아 가며 쳐다본다. 아예 자세를 고치며 얼굴을 수진쪽으로 돌리는 철수, 새삼스럽게 뭔가 깨달은 듯한, 음미하는 표정이 된다. 적막이 조금 흐르다가:
철수: (진실한 어조로) 참... 이쁘다...
명주,지현: 오으우~~!
노가다들: (소주를 삼키며) 크으으으.
수진, 환하게 웃는다. 어떤 비일상적이고 신비로운 분위기가 모두에게 깃드는 느낌이다.
노가다1: 어디 대패 없냐? 닭살 좀 깎아야 되겠다.
노가다2: 왠만한 걸로 안 밀리겠는데 이거!
노가다3: (수진에게) 아예 확 살림 차리세요! 우리 십장, 아니 우리 소장님 꼬불쳐 돈 많아요. 얼마나 짠돌인데...
윤아: 잘 해 봐. 나 간다.
윤아, 가방을 챙기며 일어난다. 지현과 명주, 따라서 일어난다. 이 순간, 수진은 철수를 쳐다본다. 철수도 수진을 쳐다본다. 서로의 눈빛이 강렬하다. 철수, 슬쩍 수진의 손을 잡는다... 조용해진다... 철수와 수진, 서로를 응시하는 순간, 시간이 멈추는 느낌이다... 둘의 클로즈업에서, 카메라가 서서히 빠지면 테이블에 둘만 남아있다 시간경과의 또 다른 재미있는 묘사. (시간이 오래 지난 느낌. 조용한 포장마차 안에는 주인 아줌마만 열심히 설거지를 하는 모습이 보인다.)
소주잔에 술을 따르는 철수. 소주가 흘러 넘친다. 철수가 수진에게 소주잔을 주며 속삭인다. 소주가 넘치며 수진의 손가락을 적신다.
철수: 이거 마시면 우리 사귀는 거야.
수진: 안 마시면?
철수: 안보는 거지. 죽을 때까지...
수진, 약간 긴장하는 표정, 그러나 금세 들이킨다. 순간, 철수, 수진에게 키스를 한다 아름다운 러브테마 시작.... 카메라, 포장마차 밖으로 점차 빠진다... 포장마차 주인은 넋을 놓고 키스 장면을 바라본다.
다음은 몽타쥬 시퀀스 음악이 계속 이어지면서... (MONTAGE SEQUENCE)...
27. A-1. 이용원 낮:
면도칼이 부드럽게 철수의 수염을 깎아 내려간다. 거품과 함께 밀리는 수염... 다양한 각도에서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하는 철수의 맨 살... 수염이 다 깎일 무렵, 눈을 감고있던 철수는 천천히 한쪽 눈을 서서히 뜬다. 험상 굳게 생긴 이발소 아저씨, 면도칼을 들고있다...
28. B-1. 야구연습장 밤 (교차편집):
파자마 바람의 아저씨, 자다 깬 듯 머리가 봉두난발이다. 똥씹은 표정. 자물통을 열어서 철수 야구연습장 장면에선 수염이 길다. 와 수진을 야구연습장 안으로 들여보내준다.
A-2. 이용원 (교차편집):
이발소 아저씨, 철수에게 애프터셰이브(면도후의 로션)를 건넨다. 철수, 몇 방울을 손바닥에 떨어뜨려 얼굴에 비빈다. 갑자기,
철수: (따가워서) 아악!
B-2. 야구연습장 (교차편집):
야구 배트를 집어 들며 기계에 동전을 집어넣는 철수, 수진을 한번 쳐다본다. 수진, 철창 밖에서 철수를 지켜본다. 타석에 서서 배트를 휘두르는 철수. 폼이 제법이다. '윙...' 공 나오는 기계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야구공들이 파이프를 따라 기계 안으로 나란히 들어온다... 파란 불이 켜지며 공이 타자석으로 날아온다. '탕... 탕... 탕...' 날아오는 공마다 홈런성 타구로 받아 치는 철수. 이에 놀라는 수진.
29. C-1. 고급 레스토랑 저녁 (교차편집):
로맨틱한 분위기의 고급 레스토랑의 입구로 허겁지겁 뛰어들어오는 수진. 시계를 한번 본다. 늦은 모양.
웨이트리스: 몇 분이시죠?
수진, 숨을 헐떡이며 답을 못한다. 웨이트리스, 그런 수진을 이상하게 쳐다본다.
B-3. 야구연습장 (교차편집):
철수, 철창 문을 열고나오며 수진의 손을 잡는다. 놀라는 수진, 철수의 손에 끌려 타석에 엉거주춤 서게 된다.
수진: 한번도 안 해봤는데...
타석에 선 수진 뒤에 바짝 붙어 서는 철수, 배트를 수진의 손에 쥐어준다. 동시에 수진의 두 발 사이로 슬그머니 들어가는 철수의 발. 수진은 약간 놀란다. 철수, 수진의 두발을 양쪽으로 밀며, 보폭을 넓게 한다. 그리고는 자기 무릎으로 수진의 무릎 뒤쪽을 '쑤욱' 민다.
철수, 수진 바로 뒤에서 수진의 양손을 붙잡는다. 둘의 몸은 밀착된다. 기분이 묘해지는 수진. 철수는 스윙 폼을 가르치는데 정신이 팔려 둘의 몸이 닿는 것을 의식하지도 않는다.
철수: 이렇게 휘두르고... 이렇게.
철수, 기계에 동전을 집어 넣는다. 긴장하는 수진, 철창 밖으로 나가는 철수를 본다.
C-2. 고급 레스토랑 (교차편집):
웨이트리스를 따라 테이블 사이를 걸으며 주위를 둘러보는 수진... 누군가를 찾고있다...
B-5. 야구연습장 (교차편집):
수진, 철수를 뒤 돌아보다가 투수 기계쪽을 보는 순간, 공이 빠르게 날아온다.
수진: 아악!
수진, 비명을 지르며 배트를 떨어뜨린다. 환하게 웃는 철수.
철수: 자, 빠따 집어야지! 빠따!
수진, 배트를 집으려고 몸을 구부리는 데, 공이 또 날아든다.
수진: 아악!
간신히 피하는 수진. 배트를 집어 들어 조심스레 타석에 임한다. 공이 날아온다. 헛스윙 하는 수진, 반동으로 한 바퀴 빙글 돈다.
C-3. 고급 레스토랑 (교차편집):
수진은 여전히 레스토랑 안을 헤매고있다. 바로 근처에 앉아있는데도, 수염이 없는 철수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냥 지나친다. 미소 짓는 철수, 가만히 앉아 수진을 지켜본다. 수진, 답답한 표정으로 철수를 찾아 헤매고있다. 철수는 계속 그녀의 애타는 모습을 바라보며 즐긴다...
B-6. 야구연습장 (교차편집):
수진, 철창 뒤에 서있는 철수를 다시 돌아본다.
수진: (배트를 땅에 끌며) 너무 무거워!
공이 또 날아온다는 시늉을 하는 철수. 수진이 서둘러 타석에 선다. 투피스 수트 드레스를 입은 모습이 매력적이다. 힘껏 스윙을 하는 수진. 또다시 헛스윙...
철수: 공을 끝까지 봐야지!
다음 공이 날아온다. 수진은 공을 끝까지 본다. 고개를 돌려 공이 철창에 부딪히는 것 까지...
철수: 이런! 다 지나가고 뭘 쳐?
이렇게 계속 배트를 휘두르는 수진... 그러나 모두 헛스윙이다.
C-4. 고급 레스토랑 (교차편집):
[SLOW-MOTION] 철수는 계속 수진의 애타는 모습을 바라보며 즐기고있다. 두리번거리는 수진의 모습이 왠지 아름다워 보인다...
B-7. 야구연습장 (교차편집):
수진, 혼신을 다해 배트를 휘두른다. 결국 공이 배트에 맞는다. 라인 드라이브로 날아가는 수진의 타구...
수진: 이야!
C-5. 고급 레스토랑 (교차편집):
[SLOW-MOTION] 철수가 미소 짓는다. 수진, 계속 철수를 찾아 헤매다가 갑자기 이상한 느낌에 철수쪽으로 고개를 느리게 돌린다. 두 사람, 결국 눈이 마주친다. 깨끗한 철수의 얼굴을 보고 놀라는 수진. 철수, 눈썹을 쓱 올리며 어색한 미소로 인사한다. 수진은 철수의 새로운 모습에 넋이 나간다. 어색한 표정으로 커피를 마시는 철수.
30. 로맨틱한 풍경의 거리 낮
[이 씬 전체를 SLOW-MOTION 96 FPS 이상으로 찍기!] 밝은 햇살이 스며드는 도시의 어느 한 거리.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나란히 걷던 철수 이제 수염이 없음와 수진. 철수가 수진에게 뭐라고 속삭이자, 수진이 갑자기 크게 웃기 시작한다. 슬로모션으로... 그녀의 웃음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그녀는 계속 웃는다. 수진, 웃음을 참지 못해 철수에게 쓰러지듯 엉겨 붙는다. 철수도 덩달아 웃기 시작한다. [JUMP-CUT으로 다양한 웃는 모습과 순간을 보여주기]. 끝없이 계속 웃는 두 사람... 철수는 웃다가 지친 수진을 부둥켜 안는다. 뼈가 으스러지듯이... 행인들의 시선은 아랑곳 않고...
31. 철수의 집 밤
카메라, 철수의 집 뒤편에 위치한 어두운 창고/작업실을 느리게 훑고 지나간다. 철수는 무슨 '공구 매니아'인지 그 곳 안에는 거의 없는 공구 철수는 공구매니아/외국 공구도 포함가 없다. 곳곳에 나무판자, 각목, 그 외 많은 나무 조각들도 보인다.
[DISSOLVE TO: 방]
침대 위에 누워있는 철수와 수진. 서로 위아래 방향이 거꾸로 누워있고, 둘의 얼굴이 거꾸로 맞닿아있다 둘은 옷을 다 입고 있는 상태. 둘은 아직 하지 않았다!. 철수의 턱을 만지며 주위를 둘러보는 수진. 집안의 모든 가구들이 색 안 칠해진 나무로 되어있고 모양도 특이하다. (가구들이 거꾸로 보인다!)
수진: 여기 가구들 자기가 다 만든 거야?
철수: 응.
수진: 혼자?
철수, 대답이 없다. 수진, 코를 철수 얼굴에 대고 '킁 Extreme Close-up을 사용해서 감각적으로......' 향기를 맡는다.
수진: 이거 이름 뭐야?
철수: 몰라.
수진: (귀엽게) 이 냄새, 이 냄새만 맡으면 묘한 기분이 들어. 아주 어렸을 때 생각이 나. 아빠였나? 삼촌이었나? 둘 다였나? 그런 거 알아? 꼭 아이가 꿈나라 속으로 빠져드는 것 같은 그런 기분...
철수: (피식 웃으며) 이발소 아저씨 꺼야. 하나 쌔벼다 줄게.
웃기 시작하는 수진, 철수의 퉁명스러운 말들이 마냥 웃기다. 한쪽 손이 철수 주머니쪽에 놓여있던 수진, 손에 뭔가 잡힌다. 철수 주머니에서 빠져 나온, 무슨 나무조각 같다.
수진: 이거 뭐야?
수진이 허공에 올려보는데, 철수, 놀라며 잽싸게 나무조각을 빼앗으며 침대에서 일어난다. 곧장 방문 밖의 벽으로 나무조각을 집어 던진다. 나무토막 벽에 '쿵'하고 부딪히며 대각선으로 튕켜서 부엌에 있는 쓰레기통 안으로 들어간다. 또다시 웃는 수진. 나무조각은 뭘까?...
[CUT TO: 화장실/부엌]
철수의 화장실 안을 둘러보는 수진, 화장실 안에 거울이 없다.
수진: 화장실에 어떻게 거울이 없어? 거울 안 봐?
철수, 대답이 없다. 수진, 철수가 있는 부엌쪽으로 걸어간다. 웃통을 안 입은 철수가 탁자쪽에 앉아 뭔가 하고있다. 철수, 탁자 위의 대나무 피크닉 바구니를 열면 각종 차가 준비돼 있다. 철수 등 뒤에 서는 수진, 약간 놀라며 차를 담은 그릇들을 본다. 철수, 능숙하게 나무 숟가락으로 차를 떠내 포트에 담고 뜨거운 물을 부어 우린다. 수진, 철수의 등을 쓰다듬는데, 등에 흉터가 많이 있다.
철수: 멋있지?
수진: 어디서? 뭐하다...
다시 대답이 없는 철수, 몇 번에 나누어 세심하게 물을 붓는 모습이 상당히 숙련돼 보인다. 그리고 미리 준비해둔 뜨거운 밀크를 홍차에 섞어 두 잔을 만든다. 투명한 유리잔 한 잔을 덤으로 만들었다는 듯 수진에게 내민다.
철수: 마셔.
수진: (약간 놀라며) 대단한데?
철수: 노가다는 막걸리만 마시는 줄 알았지?
[CUT TO: 방]
방구석에 위치한 건축 설계 데스크에는 철수가 손수 그리다 만 설계도면이 붙어있다. 제법 잘 그렸다. 차를 마시며 도면을 자세히 살피는 수진, 이것저것 관찰하는 게 재미있다...
수진: 그리다 말았네?
철수가 대답이 없자, 수진, 돌아보면 담배를 입에 문 철수가 보인다. 그는 반대편쪽 벽에 기대어 앉아 깨알 같은 글씨의 건축서적을 읽고있다.
수진: 공부 열심히 하네? 무슨 시험 봐?
철수, 말없이 책만 본다. 설계 데스크 옆에 너저분한 책상 위를 둘러보는 수진. 건축 도구들, 설계도, 건축 서적들이 잔뜩 쌓여있다. 책이 굉장히 많다. 책상 위의 푸른빛 형광등이 깜박 깜박거린다. 이때, 수진, 무심코 (책상 밑의 맨 위쪽) 서랍에 손이 가는데...
철수: 어이~! 서랍 열면 이 집에서 아웃이야.
철수를 다시 돌아보는 수진, 살짝 미소 지으며 서랍에서 손을 치운다. 수진, 입을 비쭉거리며, 책상을 다시 둘러보는데, 책상 위에 놓여있는 작은 사진 한 장이 수진의 눈에 들어온다. 십대 후반의 철수가 어느 한 노인과 산속의 절 앞에서 찍은 사진이다. (미소는 없다.)
수진: 누구야? 할아버지야?
책을 접는 철수, 곧장 마루바닥에서 윗몸 일으키기를 시작한다. 수진, 여전히 대답을 기다리며 철수를 바라본다.
철수: (계속 윗몸 일으키기 하다가) 절 짓는 목수야. 내 사수. 옛날에...
수진: 앨범 있어? 어릴 때 어땠는지 보고싶어.
철수, 윗몸 일으키기를 하다 말고, 뒤로 텀블링 하듯 뒹굴며 수진을 향해 다리 벌려 앉는다. 수진, 철수의 행동이 마냥 신기하다.
철수: (미소를 감추며) 넌 참... 궁금 한 것도 많다.
수진: (사수와의 사진을 들어보며) 어릴 때 모습 보고싶어. 앨범 없어?
철수: 그게 다야.
수진: 가족 사진도 없어?
철수: 없어. 난... (웃으며) 그냥 처음부터 어른이었어.
수진: 왜?
철수, 바닥에서 일어난다. 곧 부엌으로 가 찬장에서 포커카드를 꺼낸다. 그리고 담배를 멋지게 꼬나물고 다양한 종류의 셔플 Shuffle: Hindu, overhand, ripple, Asian, Back (!), 3단 shuffle, 그리고 waterfall (electronic deck 사용!)을 하기 시작한다. '와!' 신기하게 지켜보는 수진... 철수를 마주보고 선다.
철수: (엄숙하게) 야바위 알아?
수진: 응? 뭐?
철수, 카드3장을 부엌식탁에 나란히 뒤집어 놓는다. 철수, 3장의 카드를 보여주더니 갑자기 빠르게 섞기 시작한다.
철수: (약장수 말투로) 자! 돈 놓고 돈 먹기! 지나가는 애도 다 맞추는 바로 그 게임!
수진, 크게 웃기 시작한다. 철수는 순식간에 야바위꾼이 되어있다. 철수의 손놀림은 완전 프로의 경지다. (철수의 말투는 우습지만 행동은 무척 진지하다.)
철수: (아주 빠르게) 자! 엄마는 반찬값! 아빠는 담뱃값! 애들은 용돈~~! 1000원이요. 1000원! 돈 놓고 돈 먹기! 날이면 날마다 오는게 아닙니다. 옆집 개도 다 맞추는 바로 그 게임! 왕을 찍으세요, 왕 이때, INSERT: 과거 회상, 철수가 어릴적에 야바위꾼 이었을 때 모습... 실루엣으로 처리...!
철수, 카드에서 손을 뗀다. 수진, 웃음을 억지로 멈추고 무슨 카드일까 고민한다. 집안에 적막이 흐르고... 이건가? 저건가? 고민하다가 결국 오른쪽카드를 찍는 수진. 철수, 카드를 뒤집으면... 꽝이다. 돈 달라고 손을 내미는 철수. 수진, 손바닥으로 철수의 손바닥을 친다. 철수, 안 된다고 고개를 젓는다. 수진, 철수의 뺨에 키스를 한다. 철수, 얼굴색에 한치 변화도 없이 조용히 카드를 다시 섞는다. 왼쪽카드를 찍는 수진. 이번에도 꽝이다. 수진, 철수의 이마에 키스를 한다.
철수, 다시 카드를 섞는다. 이번엔 느리게 섞는다. 이번에도 못 맞추는 수진. 철수는 약간 놀라는 표정. 수진은 철수의 다른 뺨에 키스를 한다. 철수, 이번엔 정말 느리게 카드를 섞는다. 철수, 카드를 섞으며 수진의 눈동자를 관찰한다. 철수, 손을 다시 멈춘다. 수진은 마음속으로 찍은 것 같다. 이때,
철수: 어!
...하며, 옆을 돌아본다. 이 순간, 수진도 시선을 잠깐 돌린다. 순식간에 카드를 이동시키는 철수. 수진, 중간 카드를 찍는다. 철수, 직접 뒤집어보라는 시늉을 한다. 수진, 약간 긴장하며 카드를 뒤집는다. 왕이다.
수진: (쌍권총을 쏘는 동작을 보이며) 얏호! 한번 더!
수진이 깔깔거리는 동안... 카메라, 서서히 빠진다. 쓰레기통 쪽으로... 쓰레기통 안을 보면, 철수가 버린 작은 나무조각품이 보인다. 미완성된 수진의 얼굴이다... 나무조각품의 얼굴로 클로즈업 되면서...
[DISSOLVE TO:]
[INSERT1:] 철수가 일하는 공사장의 건물. 'TIME-LAPSE'기법으로 빠르게 높이 세워지는 모습이 보여진다. 구름이 빠르게 흐르고... 빔들은 하나 둘씩 올려지고[SLOW-MOTION]... 그리고 벌써5층 정도까지 올라갔다 시간의 흐름을 보여주는 장치.
[INSERT2:] 신비스러운 장면: TIME-LAPSE 촬영으로 요리조리 미로 같은 골목을 헤매이며 걷는 누군가(수진?)의 POV POV: Point of View... 꿈 같은 이미지로... 초현실적인 느낌... (사람들이 미소 짓는 모습도 슬로모션으로 보이고...) 그러다가 어느 거대한 문 안으로 들어가면...
32. 거대한 섬유공장 내부 낮
거대한 섬유공장의 복도를 조금 빠르게 걷고있는 수진. 그리고 그 옆에서 그녀를 따라 걷는 공장장(40대). 수진의 얼굴에서 미소가 지워지지 않는다.
공장장: 또 길 헤매셨어요?
수진, 말없이 미소만 계속...
공장장: 뭐 좋은 일 있으세요?
[CUT TO:]
길게 펼쳐진 검푸른 원단을 만져보기도 하고 밝은 램프 밑에 대보기도 하는 수진... 공장장, 약간 긴장한 표정으로 수진을 지켜본다.
수진: 스트라이프 간격 잘 잡으셨어요. 수입원단보다 부드럽고... 근데 쎄루비안 블루가 아니네? 제가 쎄루비안으로 부탁하지 않았나요?
공장장: 코발트 아니었나요? 분명 코발트라고 들었는데...
수진: (가만히 공장장을 쳐다보다가) 쎄루비안 블루요.
공장장: 코발트에요! 코발트! 제가 여기 쪽지에다 적었어요. 봐요!
공장장, 작은 노트장을 바지주머니에서 꺼내 펼쳐 보인다. 분명 '코발트 블루! 김수진 팀장'이라고 적혀있다. 수진도 질세라 자기 가방에서 노트를 꺼내 종이를 넘기기 시작한다. 펼치다 보면 '코발트 블루' 그리고 그 옆에 쎄루비안 샘플이 붙어있다. 수진, 당황한 표정을 감추며, 쎄루비안 샘플을 종이에서 뜯어내며 노트를 가방 속에 집어넣는다.
수진: (웃으며) 봐요! 쎄루비안이잖아요!
공장장: 아이참, 알았어요! 수정원단 나오면 당장 계약하는 겁니다!
수진, 미소를 살짝 지으며 펼쳐있는 원단을 다시 손으로 만지며 말한다.
수진: 어떡하죠? 이 원단은...
공장장: 어떡하긴 뭘 어떡해요! 갖다 버리는 거지...
수진, 뭔가 곰곰이 생각하는 표정... 갑자기 옷감을 높이 펼쳐 들며.
수진: (애교부리며) 저 주시면 안돼요?
33. 샘플 실, 수진의 회사 밤
재단대위의 가위가 '코발트' 옷감을 싹뚝싹뚝... 재봉틀, 드르륵 드르륵... 양복 한 벌이 만들어 지는 과정이 보인다. 먼지 속에 수진과 친구들이 열심히 옷을 만들고 있다.
윤아: (재봉틀 하다 말고) 야 수진아, 우리가 돈 줄게. 그냥 사라, 잉?
지현: (바느질하다가 바늘에 찔리며) 아야! 이씨! 김수진! 너 우정을 이렇게 착취하는 거 아니다.
명주: 옛날 '졸작'프로젝트 할 때 생각난다.
수진: (마네킹에 윗도리를 걸치며) 그래! 재밌지? 재밌잖아. 이러면서 우정도 돈독해지는 거야...
수진, 윗도리의 가슴부분을 부드럽게 만져보고는 뒤로 물러나서 옷을 가만히 바라본다. 제법 멋있다... 뿌듯하다... 카메라[수진의 POV], 옷으로 근접한다...
34. 대한 건축사 협회 건물 일요일 아침
카메라, 옷에 근접하면 팔이 움직여 목에 맨 넥타이를 푼다. 철수가 옷을 입고 있다.
철수: (수진에게) 이런! 시험 치러 왔지, 무슨 패션쇼하러 왔는 줄 알아? 목엔 이걸 꼭 매야 돼?
수진: (웃으며) 아 이런! 가방이 안 어울리네?
철수는 멋진 양복차림이지만 손에는 낡은 노가다 가방이 쥐어져 있다.
[CUT TO: 로비]
거대하고 멋진 건물의 로비. 철수, 에스컬레이터를 오르며 주위를 둘러본다. 크고 세련된 디자인이 압도적이다. 철수, 문득 고개를 돌려 빌딩 밖을 돌아보면, 멀리서 수진이 창 밖에서 철수를 보고있다. 수진, 손으로 철수에게 쌍권총을 쏘며, 'V'자를 만들어 보이며 미소 짓는다.
[CUT TO: 시험장]
엘리트 분위기의 남자들이 시험장안을 조용히 메우고 있다. 창가의 설계 테이블에 자리잡고 있는 철수, 그의 뒤에서 남자들의 대화소리가 들린다.
남자1: (소곤소곤) 공부 많이 하셨어요?
남자2: (소곤소곤) 응. 아니. 몰라. 제길 이번에 떨어지면 다섯 번째다...
낡은 노가다 가방을 여는 철수, 일단 옷차림에서는 뒤지지 않는다. 가방 안에서 삼각자와 낡은 계산기, 그리고 다양한 종류의 연필을 꺼낸다. 근데 갑자기 뭔가 집힌다. 꺼내보면 작은 엿... 예쁘게 하트 리본이 묶여있다. 철수, 피식 웃으며, 엿의 비닐 껍데기를 푸는데, 부시럭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린다. 옆자리의 남자들이 철수를 쳐다본다. 철수, 엿을 잽싸게 입에 문다. 이때,
시험관: (철수를 보며) 먹는 건 일체 금합니다.
철수, 엿을 입 속으로 집어 놓고는 입을 꼭 다문다... 책상을 도는 시험관, 시험지를 나누어 주기 시작한다...
[INSERT:] 창밖에 흐르는 구름 (시간경과)...
[DISSOLVE TO:]
철수는 종이에 삼각자를 대고 연필로 열심히 뭔가를 그리고 있다. 양 손바닥에 고인 땀이 종이를 적신다. 바지에다 양손을 닦는다. 이마에도 땀이 고여있다. 머리도 헝클어져있다. 넥타이도 풀어 제친다...
[INSERT:] 하늘이 붉게 노을 지고 (다시 시간경과)...
[CUT TO: 건물 밖]
수진, 빌딩 밖으로 나오는 철수를 말없이 바라본다. 철수의 표정, 좀 어둡고 몹시 지쳐 보인다. 넥타이는 손에 쥐어있다.
철수: (기운 없이) 집에 가래니까. 여태껏 뭐했어?
수진, 말없이 철수를 따라 걷는다. 철수, 머리가 아픈지 정수리를 어루만진다.
철수: (웃으며 혼잣말로) 그냥 노가다로 사는 게 편하겠다...
철수, 수진의 손을 잡는다. 기분이 좋아지는 수진... 조용히 거리를 걷는 두 사람...
[DISSOLVE TO:]
35. 작업실, 철수의 집 낮
햇살이 따스하게 창문 안으로 스며드는 주말 아침... 철수는 뭔가를 섬세하게 깎아내고 있다. (절에 부착되는 문양 같은 것을 만드는 난이도 높은 작업...) 근처에 수진은 나무토막 붙잡고 사포질 중이다. 철수, 수진을 계속 부려먹는다. 철수는 런닝셔츠, 수진도 몸에 달라붙는 여성용 런닝을 입고있다...
철수: 쥐꼬리톱! 줄자, 그리고 끌도.
수진은 뒤에서 열심히 사포질하고 있다가 시키는대로 가지고 오다가 잘못 가지고 온다.
철수: 어이, 시다바리 아가씨, 짤리구 싶어?
수진: (웃으며) 무슨 톱이 이렇게 많아? 글구 톱 이름이 쥐꼬리톱이 뭐야?
철수, 무표정하게, 대패 하나를 잡는다. 새 나무토막을 얹고 자세를 잡고 있는데 수진이 다가온다.
수진: 내가 해보면 안돼?
철수,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인다.
수진, (대패를 잡으며, 귀엽게) 이게 제일 만만해 보이는데? 목욕탕에서 때밀듯이... 이렇게 밀면 되는 거 아냐?
그러나 대패는 거의 움직이질 않고 겨우 움직이자 '드드득', 소리와 함께 대패가 튕겨나오고 만다.
철수: (눈을 흘기며) 봐. 일단 결을 보는 거야.
철수, 수진의 손을 나무 표면에 갖다 댄다. 약간 에로틱하다. 철수, 대패를 반대방향에서 하면 톱밥이 멋있게 쭈욱 말리며 나온다.
수진: (존경스런 눈초리로) 와...
수진 신나게 대패를 미는데 철수, 수진의 손 위에 자기 손을 얹는다. 문득, 대패가 멈추고 둘의 눈이 맞는다. 철수와 수진, 눈을 감으며 키스한다. 좀 어색한 분위기에 철수는 톱밥을 한 주먹 손에 쥐더니 수진의 머리에 뿌린다.
수진: 아악!
수진도 톱밥을 철수에게 마구 던지며, 둘은 톱밥으로 장난을 치기 시작한다. 수진, 도망을 치다가, 어느 처음 보는 문을 열고 들어간다.
철수: 어! 안돼!
수진, 불을 켜는데, 눈이 휘둥그래진다. 작은 미니어처 들이 가득 진열되어있는 방이다. ('꿈의 궁전') 특이한 디자인들이 눈에 띤다. 고전적인 건물들도 많다... 수진, 미니어처들을 둘러보다가 철수를 존경스런 눈빛으로 바라본다. 문지방에 서있던 철수, 겸연쩍은 표정을 짓다가 밖으로 걸어나간다.
철수: 만지면 안돼.
수진, 미니어처에 손이 간다. 아이처럼 이것저것 만져본다...
36. 수진(부모)의 집 일요일 해질 무렵
[INSERT:] 정원의 아름다운 꽃들 클로즈업... 그리고...
[INSERT:] 부엌의 창가에 놓인 화분의 꽃의 클로즈업... [TIME-LAPSE로] 꽃 봉우리가 펼쳐지며 카메라 서서히 옆으로 빠지면...
부엌에서 커피의 달콤한 향을 음미하고 있는 수진... 커피를 홀짝 마시며 창 밖을 바라본다. 수진의 부모가 넓은 정원에서 여유롭게 식물 가꾸기를 하고있는 모습이 보인다. 김사장(아버지)이 꽃밭에 호스로 물을 주고있다. 근처에서 나뭇가지를 다듬던 수진의 어머니, 장난기가 발동하여 물호스를 발로 밟는다. 호스 끝에서 물이 안 나오자, 김사장은 의아해 하며 호스를 만지작거린다... 수진, 흥미롭게 부모를 지켜본다.
김사장이 호스구멍을 보려 할 때, 부인 발을 든다. 곧장 수돗물이 김사장의 얼굴로 터져 나온다. 수진은 재미있게 웃는다. 순식간에 물에 흠뻑 젖은 김사장, 옆을 돌아보니 부인이 웃다가 도망친다. 빠르게 쫓아간다. 두 사람은 마치 어린아이 같다.
이때, '찰칵' 문고리 소리에 뒤돌아보는 수진. 동생 정은이 야한 옷차림으로 집을 몰래 나서고 있다. 얄밉게 미소 짓는 정은, 수진에게 '쉬...' 싸인을 보내고는 밖으로 조용히 나간다. 수진, 커피를 홀짝 마시며 다시 창 밖을 보면, 그녀의 부모가 서로 탱고 하듯 엉겨 붙어있다가, 수진의 아빠가 수진의 엄마의 허리를 잡고 뒤로 젖힌다. (마치 '여인의 향기'에 나오는 장면처럼...) 엄마, 어색해하며 웃는다. 아빠, '가만히 있어봐!'하며 미소 짓는다. 둘이 몹시 행복해 보인다. 수진, 조금 부러워하는 표정...
[CUT TO:]
정원에서: 수진이 건넨 하얀 수건으로 얼굴을 닦고있는 김사장. 둘은 나란히 벤치 그네에 앉아있다. 왔다 갔다 흔들리는 벤치 그네... 수진, 부엌을 보면 어머니가 부지런히 음식준비를 시작하고있다.
김사장: (조용히) 너 요즘 누구 사귀지?
수진: (놀라며) 예? 아, 아뇨.
김사장, 수진을 가볍게 노려본다. 수진, 잠시 머리를 굴리다가:
수진: 윤아죠?
김사장: 어? 윤아는 아냐! 윤아는 절대 아냐!
수진 역시 김사장을 노려본다. 김사장은 조금 찔리는 눈치. 결국 고개를 끄덕인다.
김사장: 뭐 무슨 공사판 노가다 같은 놈이래매?
수진: 예? 무슨 소리에요? 내가 무슨 노가다랑...
김사장: 그럼 뭐하는 사람이야?
수진: 음... 건축가.
김사장: 어 그래? 진짜? 한번 보자.
수진: 엉? 안돼.
김사장: (놀라며) 안돼?
수진: 아니, 그게 아니구...
김사장: 안돼?
수진: 아니, 그게... 아빠~~
김사장: (속삭이며) 일단 집에 데려와. 아빠가 다 해결해줄게. 알았지?
수진, 왠지 시무룩해진다. 김사장, 수진을 보다가:
김사장: 심각한 사이니?
수진, 대답이 없다. 더 시무룩해 보인다.
김사장: 결혼하고 싶구나? 그 사람이랑?
수진,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끄덕...
37. 야구 연습장 낮
휘둘러 지는 배트. '탕'... 수진은 철창 밖, 철수는 철창 안. 철수, 배트를 내리며 말한다.
철수: 안돼.
수진: 왜 안돼?
철수: 안~ 돼!
수진: 왜!
철수: 싫어. 필요없어.
수진: 왜 싫은데?
공이 날아와 철창에 부딪힌다. '퍽!'
철수: 우리 둘이 만나는데 부모님이 왜 끼어들어?
수진: 부모님이 보셔야... 거... (잠시 멈칫, 그러나 결심한 듯) 결혼을 하지!
철수, 약간 벙찐 얼굴로 수진을 바라본다.
38. 인천 재재소 다른 날
거대한 목재들이 쌓여있는 재재소. 나무냄새가 물씬 풍긴다. 어슬렁거리며 나무를 고르고 있는 철수에게...
수진: 왜 안돼? 나 사랑하지 않아?
철수: 발목 잡지마, 제발.
수진: (떨리는 목소리로) 나 사랑하잖아?
철수: 곧 식을지도 몰라.
철수의 냉정함과 태연함이 충격적이다. 답답함에 마냥 고개를 젓는 수진...
39. 창고 작업실 (철수의 집) 다른 날
햇살이 따스하게 스며드는 먼지가 자욱한 작업실. 말없이 합판을 옮기며 전기 톱을 준비하는 먼지투성이 철수에게 큰소리로 말하는 수진, 먼지 때문에 코와 입을 가리고 다른 손으론 먼지를 날리고 있다.
수진: 왜 대답 못해? 나 사랑 안 해?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가 그렇게 힘들어?
철수: 사랑? 말이야 쉽지. 말로는 뭘 못해? 울 엄마가 하나밖에 없는 애새끼 팽개치고 내빼기 전에, 날 붙들고 뭐랬는 줄 알아? '사랑해, 철수야...' '엄마, 나도 사랑해...'
철수, 경멸의 눈빛으로 수진을 노려본다.
철수: 아무 대책도 없이, 책임도 못 질 거면서, 사랑, 사랑 나불대지마. 엉? 알았지?
그리고, '왱!...' 철수는 전기 톱으로 나무를 자르기 시작한다...
40. (그때 그) 편의점 앞 다른 날
빠르게 길을 걷는 철수 수염은 깎았어도, 머리는 여전히 헝클어져있다.... 총총걸음으로 따라가는 수진...
철수: 아~ 씨! 이 찐득이, 찐득이! 야 삽질 좀 그만해~~! 넌 공주고 난 그지야. 니가 더 잘 알잖아! 우리 오래 못 가! 넌 도대체 내가 뭐가 그리 좋냐~~!
수진: 다~~!
철수: 왜?
철수, 멈춰 선다. 수진, 말문이 막힌다. 옆을 돌아보니 옛날 둘이 처음 만났던 편의점이다. 철수도 본다.
수진: 여기 기억 나?
철수: 안 나! 몰라!
철수, 다시 빠르게 걷기 시작한다.
철수: (웃으며/무섭게) 따라오지마.
수진: (웃으며) 아이고~ 무서워라!
뛰어 도망치는 철수... 뒤쫓아 뛰는 수진...
41. 공사장 다른 날
여전히 공사중인 그 건물의1층. 구석에 서있는 수진... 그리고 철수는 쭈그려 앉아 연장을 가방 안에 집어넣고 있고... (수진은 굽 높은 하이힐에 스커트, 그리고 철수의 낡은 헬멧을 머리에 쓰고있다. 귀여운 모습... 둘 사이에 먼지가 소용돌이치고...)
수진: 혼자 살 수 있을거 같애?
철수: 응. 혼자 살 수 있을거 같애. 같이 살면? 같이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애? 어차피 혼자 왔다 혼자 가는 인생...
말문이 막힌 수진, 답답한 표정으로 눈물을 글썽이자... (먼지에 우는 건지, 슬퍼서 우는 건지?)
철수: 넌 참~~ 눈물도 많다. (짐을 챙기며) 제기랄, 부모를 잃었어? 나라를 잃었어?...
철수, 일어서면서 주변에서 구경하는 노가다들을 발견한다.
철수: 아~ 씨! 진짜 쪽 팔리게 여기서 왜 이래!
수진, 둘러보면 노가다1,2,3이 둘을 멀리서 바라보고있다. 이때, 김사장이 공사장에 나타난다. 깜짝 놀라며 컬럼 뒤로 잽싸게 몸을 숨기는 수진, 몸을 구부리고 빠르게 뛰어 공사장 뒷구멍으로 도망친다. 의아해 하는 철수, 수진의 뒷모습을 보며...
철수: (혼잣말로) 내 헬멧!
42. (그때 그) 고급 레스토랑 밤
마주보고 앉아있는 철수와 수진. 철수는 왕게요리를 게걸스럽게 먹고있다.
수진: (눈물을 글썽이며) 좋아. 좋아. 결혼 안해도 돼. 알았어. 까짓거. 식을 때까지 사귀지 뭐. 그래, 알았어. 여자를 어쩜 이렇게 초라하게 만들 수가 있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행복한 가정을 꿈꾸는 게... 그게 죄야?
철수: 맛 죽인다 이거.
아랑곳하지 않고 열심히 게다리 껍데기를 크래커로 부수는 철수. 잘 안되는지 용을 쓰고 있다. 이때 수진이 테이블에 나무조각 하나를 올려놓는다. 철수의 집 쓰레기통에 버려졌던 여자얼굴의 조각이다.
수진: 이걸로 부셔. 꼴도 보기 싫을텐데.
수진, 눈물을 글썽인다. 철수, 수진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말을 시작한다.
철수: 난... 난 널 책임질 수 없어. 아니, 책임지기 싫어.
수진: 왜?
철수: 니가 무서워.
수진: (애타게) 왜~?
철수: 넌 너무 자신만만해. 너 인생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아? 우리가 결혼한다고 쳐. 정말 영원히 행복할 수 있을까?
눈시울이 붉어지는 수진, 눈물을 머금으며 조용히 씩씩거린다. 이때, 수진이 철수의 어깨너머로 뭔가를 봤는지 눈이 휘둥그래지며 놀란다.
수진: 어! 아빠?
김사장: 뭐 '어, 아빠?' 니가 불러 놓곤 뭘?
김사장 뒤에는 수진의 어머니, 그리고 정은이 서있다. 김사장, 수진을 보다가 철수와 눈이 마주친다. 순간, 놀라는 김사장과 철수, 둘 다 충격을 받은 듯 아무 말도 못한다. 수진은 불안한 표정으로 둘을 번갈아 본다. 철수, 수진을 쏘아보자, 수진 어색하게 이빨을 보이며 '씨익' 웃는다. (수진의 표정, 조금 익살스럽다.) 이때,
수진의 어머니: 서로 아는 사이세요?
이때, 철수,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는데, 수진이 빠르게 철수의 손을 잡는다. 수진, 애원하듯 철수를 바라본다. 철수, 순간 고민한다. 자리를 뜰 것 인가?...
[CUT TO:]
결국 떠나지 않은 철수, 수진의 가족을 마주하고 앉아있다. 아무도 말이 없다. 김사장과 철수의 표정이 심각하다. 아버지 옆 구석에 몰려있는 수진, 머리가 아픈지 팔꿈치를 테이블에 괴고 이마를 만지고있다. 곧 음식이 나온다. 정은이 음식을 건드리려 하자, 손을 '탁'치며 가만히 있으라고 눈을 부라리는 수진의 어머니.
수진의 어머니: (김사장에게) 말씀 좀 하세요.
김사장, 아무런 반응이 없다. 수진, 흐리멍덩한 눈빛으로 자리에서 힘없이 일어난다.
수진의 어머니: 얘, 어디가니?
수진: 잠깐 화장실 좀...
수진, 레스토랑 구석의 화장실로 향하는데, 현기증이 좀 나기 시작한다... 힘들게 화장실 앞에 가보니, 화장실에 물이 넘쳐, 급히 공사를 하고있다.
웨이터: 죄송합니다. 지하 화장실로 가시죠. 따라오십시오.
레스토랑 지하 (교차편집):
웨이터를 따라 지하로 내려온 수진, 복잡한 미로 같은 복도를 지나 화장실 안으로 들어간다.
웨이터: (웃으며) 찾아 오실 수 있으시겠죠?
웨이터의 말을 들으며 화장실 문을 닫는 수진. 웃을 겨를이 없다. 어지러움에 비틀거린다. 곧장 세면대 앞에 서서 물을 튼다. 화장실 안의 형광등이 깜박거린다. 수진, 머리를 움켜잡으며 몸을 세면대쪽으로 구부린다...
한편, 위층의 레스토랑에서는 (교차편집):
테이블 위에 놓인 철수의 작은 미완성 조각품이 김사장의 시야에 들어온다. 김사장, 나무조각을 집어보려고 손을 뻗는데, 철수가 빠르게 먼저 챙긴다. 나무조각을 주머니에 집어넣는 철수에게:
김사장: 요즘에도 그런 낡은 수법을 쓰나?
철수, 똥씹은 표정이 된다. 억울하다. 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않는다.
다시 화장실 (교차편집):
계속 나오는 수돗물... 수진은 세수를 하기 시작한다. 물에 화장이 그로테스크하게 뭉개진다...
다시 레스토랑 안 (교차편집):
김사장, 물을 한 모금 마시며 말한다.
김사장: 부모님은?
철수: (한참 후) 따님께서 얘기 안 하던가요?
다시 레스토랑 지하 (교차편집):
화장실에서 휘청거리며 나오는 수진, 화장이 징그럽게 번진 얼굴로 복도를 걷는다. 머리를 붙잡고 복도를 걷는데, 이상하게 장소가 생소하게 느껴진다. 수진, 두리번거리며 걸음이 느려진다 재미있는 비주얼: 서용준이 부인과 애와 함께 레스토랑지하 복도를 걸어간다... 수진 그들을 지나다가 돌아보면 아무도 없다.. 이때, 갑자기 수진의 시야[POV SHOT]가 이상하게 서서히 좁혀지기 시작한다. 놀라는 수진, 멈춰 서며 심호흡을 한다. 눈을 한번 감았다 뜨지만, 그녀의 시야는 계속 좁혀져만 간다. 귀에도 '웅~ 웅~' 이상한 소음들이 들린다. 공포에 빠지는 수진, 이마를 잡으며 벽에 기댄다. 얼굴이 일그러지며 벽에 머리를 처박듯이 비비기 시작한다. 몹시 괴로워 보인다. 이때 마침 지나가던 청소부가 멈칫하며 묻는다.
청소부: 왜 그래요? 괜찮으세요?
눈을 계속 감고있는 수진, 대답이 없이 숨을 크게 내쉰다.
청소부: 어디 아퍼요?
수진: 저... 여기가... 여기...
수진, 겨우 눈을 뜨며 청소부를 바라본다. 좁아졌던 그녀의 시선이 다시 넓어져있다. 복도를 둘러보는 수진... 숨을 몰아 쉬며 말한다.
수진: ...여기가... 어디죠?...
청소부, 의아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본다...
다시 레스토랑 안 (교차편집):
김사장과 철수, 계속 살기어린 눈빛이 오고 가다가...
김사장: 자네, 집은 있나?
철수: (피식 웃다가) 이만 가보겠습니다.
김사장: 내일부터 나오지마.
철수: 나올 생각 없습니다...
철수, 일어나려고 머뭇거리다 다시 앉으며, 초조하게 주위를 둘러보며 수진을 찾는다...
레스토랑 빌딩 복도 (교차편집):
수진, 겨우 복도를 나와 현관을 나오는데 이상한 골목이다... 마침 소나기가 거세게 내리기 시작한다 왜? 멜로영화니까..
다시 레스토랑 안 (교차편집):
철수: ...그래도 일은 일이니까, 제 밑에 시다들은 일주일 더 빌려드리죠.
김사장: 필요 없어!
철수, 더 이상 참다 참다 못참은 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
수진의 어머니: 그래도 잠깐만. 식사는 마치고 가지 그래요? 아니, 그게 아니라... 수진이 오면...
다시 앉는 철수. 이때, 레스토랑 밖에서 웅성웅성 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정은이 호기심어린 표정으로 일어나려 하자, 어머니가 정은을 붙잡는다.
어머니: (작은 소리로) 가만 있어!
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앉는 척하더니 곧장 현관 쪽으로 뛰어간다. 어처구니 없어하는 어머니.
철수: 저 가보겠습니다. 따님하고의 일은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연락...
정은: (밖에서/목소리만) 아악! 엄마!
현관 밖에서 정은의 비명 소리가 들린다. 김사장, 철수, 어머니, 모두 놀란다. 총알같이 튀어나가는 철수...
레스토랑 밖:
철수, 나가보면 사람들이 웅성거린다. 땅바닥에 수진이 쓰러져있다. 눈이 휘둥그래지는 철수...
[CUT TO:]
[진짜 느린SLOW-MOTION] 철수, 수진을 안고 뛴다 Love Theme 시작. 뒤따르던 아버지, 어머니, 헌신적이고 과단성 있는 철수의 모습에 약간 놀란다. 곧 철수를 따라 정은과 함께 뛰어간다.
43. 병원 응급실 밤
피범벅이 된 환자가 들것에 실려 응급실로 들어가는 와중 Slow-motion...
응급실 의사: (철수의 POV로) 아마도... 과도한 스트레스로 인해 잠시 정신을 잃은 것 같습니다. 빈혈증세도 있구요. 좀 자고 나면 괜찮을 거 같습니다.
[CUT TO: 응급실 침대들 사이로...]
철수, 느리게 하얀 커튼을 저치고 들어가면... 링거를 꽂고 있는 수진이 보인다. 철수를 발견하는 수진, 곧장 일어나며 두 팔을 뻗는다. 철수가 다가가자, 그를 아주 힘껏 부둥켜 안는 수진... 눈물을 흘리기 시작한다. 김사장과 부인, 뒤에서 둘을 지켜본다. 수진, 기쁘게 흐느끼며 아버지를 애절하게 바라본다. 철수를 강렬히 포옹하고 있는 딸을 조용히 바라만 보는 김사장, 옆에 서 있는 부인을 보자 부인, 고개를 끄덕여 동의의 뜻을 표한다.... 이때 철수, 느리게 고개 돌려 김사장을 바라본다.
44. 병원 밖 밤
병원 밖에서 담배 피우는 김사장, 옆에 철수가 서있다. 김사장, 철수에게 손을 뻗으며 악수를 권한다.
김사장: 숨겨둔 애는 없지?
철수, 약간 놀라는 기색으로 김사장을 바라본다. 그러나 결국 그 의미를 알아차린 철수, 김사장과 악수를 한다. 체념과 희망이 교차하는 표정이다.
김사장: (고개를 저으며) 내가 자네를 그리로 보내는 게 아니었는데... 아주 중매를 선 꼴이 됐구만. 허 참!
철수, 엉거주춤 어색한 표정으로 근처에 세워진 김사장의 차 안을 보면, 수진과 어머니가 철수를 보고있다.
김사장: (목소리만) 잘해...
45. 웨딩샵 맑은 일요일 오후
김사장: (계속/목소리만) 너 일할 때 열정처럼, 가정에도 충실해야 된다...
카메라(사람의 시선), 느리게 웨딩샵의 널찍한 드레싱 룸에 들어간다 Love Theme 연속 [SLOW-MOTION]... 서서히 바닥에 길고 아름답게 펼쳐진 웨딩드레스의 헴을 따라 다가가면 웨딩드레스를 입은 수진의 뒷모습이 보인다. 천천히 수진에게 다가가는 카메라. 수진은 어머니와 정은, 그리고 친구들(윤아 외)에 둘러 쌓여있다. (수진회사의)작업자 한명이 열심히 드레스에 마지막 손질을 하고있다. 수진, 문득 느껴지는 인기척에 뒤돌아본다. 카메라(철수)를 보고 행복한 미소를 짓는 수진... 철수는 멋진 턱시도 차림이다... 미소 짓는 철수...
[DISSOLVE TO:]
46. 철수의 신혼 집 (가을) 낮
['원씬 원테이크'(One-scene-one-take)]
철수와 수진의 결혼사진에서 시작. 카메라, 사진에서 천천히 줌아웃[zoom-out]하면... 철수와 수진 양 옆에는 수진의 가족과 친구들이 미소 지으며 서있다. (결혼식 결혼 사진이라기보다는 턱시도와 웨딩드레스를 입은 가족사진의 분위기다. 은 수진부모의 집 뒤뜰에서 간소하게 치러진 것 같다...) 사진 찍을 당시 렌즈에 소프트 필터를 댔는지, 마치 꿈속처럼 보인다. 카메라, 계속 빠지면 결혼사진 옆에 철수의 건축사 자격증이 액자로 처리된 채 걸려있다...
카메라, 계속 빠지면 부엌이 보인다. 레인지에 뭔가 끓고 있는데, 연기가 나오다 냄비 안의 내용물이 불타며 시커먼 연기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한다 [slow-motion]. 카메라, 계속 빠지면 연기가 뿜어 나오는 냄비를 향해 필사적으로 달리는 철수의 뒷모습이 보인다 [EXTREME slow-motion].
'찰칵' 레인지의 스위치를 돌리는 철수의 손. 연기가 자욱한 부엌 안에서 드러나는 철수의 심각한 얼굴. 조금 걱정스러운 표정이다.
수진: (목소리만) 어머! 어쩌지!
...라고 외치며 시커먼 연기를 헤치며 나타나는 수진. 목욕가운을 두르고있다. 연기가 자욱한 부엌에 가만히 벽보고 서있는 철수, 뒷모습이 화나있는 것처럼 보인다. 철수, 천천히 뒤로 돈다. 그는 의외로 환하게 미소 짓고있다.
수진: 미안. 미안. 요즘 건망증이 너무 심해졌네. 내가 왜 이러지 정말?
철수: 목욕은 다했어?
수진: 응.
철수: 진짜?
수진: (웃으며) 그럼!
철수: 확실해?
철수, 수진의 목욕가운 벨트를 느리게 풀기 시작한다. 조금 긴장하는 수진, 철수를 쳐다본다. (연기가 스믈스믈 빠져나가면서 스모그현상이 일며 창가에서 아름다운 햇살이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철수, 목욕가운을 풀며 말한다.
철수: (느리게) 진짜 씻었어?
수진: 진짜야!
철수: 확실해?
수진: (웃으며) 자꾸 헷갈리게 왜 그래?
철수, 자기만 볼 수 있도록 가운을 앞으로 펼치며 수진의 몸을 감상한다. 수진, 약간 놀라지만 가만히 있는다. 수진, 창쪽을 보며 누가 밖에서 보나 불안하게 살핀다. 창 안으로 내리쬐는 햇살이 아름답다... 철수, 수진의 몸을 계속 감상한다. 철수를 쳐다보는 수진. 기분이 묘하다...
철수: 가슴도 씻었어?
수진: (웃으며) 몰라.
철수: 겨드랑이는?
수진: (장난스럽게) 씻은 것 같아.
철수: 발꼬락은?
수진: 몰라. 묻지마. 이제 그만 봐.
수진, 목욕가운을 획 붙잡아 당긴다. 앞을 가리며 다시 화장실로 향하는데, 철수, 수진을 뒤에서 덮치며 순식간에 안아 든다.
수진: 아악!
수진을 침실로 안고 가는 철수. 침실 안으로 들어가며 둘은 키스를 한다. 철수, 한쪽 발로 침실의 문을 닫는다. '꽝!'
[CUT TO: 침실 안]
수진의 손이 흐느적 모아지며 수진의 머리 뒤로 쓸려 내려간다. 철수가 그녀를 수평으로 바쳐 들고있고... [정원에서 수진의 부모가 탱고하는 모습과 교차된다.] 수진, 사랑스런 눈빛으로 철수를 쳐다본다. 철수, 곧 수진을 침대 위에 올려놓는다 부감샷/꿈 같은 이미지로......
47. 공사현장, 빌딩 앞 낮
파란 하늘엔 아름다운 뭉게구름이 펼쳐있다. 예전에 공사하던 건물이 높이 서있다. 아직 완성은 멀었지만 이제 외형을 구체적으로 알아볼 수 있다.
공사장 빌딩 꼭대기... 창 밖에서 카메라 헬기촬영?가 서서히 빌딩 꼭대기로 다가가면...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다. 상량식의 시작이다... 카메라 기둥들 사이로 들어가면...
여러 개의 '보'가 철 기둥에 나란히 얹어져 있고, 현재, 그 '보' 위에 마지막으로 지붕의 마룻대를 올리는 과정이다. 마룻대는 광목으로 특이하게 포장되어있다. 철수가 한쪽에서 목수들과 함께 밧줄을 잡아당긴다. 다른 한쪽에선 김사장과 박전무 그리고 몇몇 목수들이 밧줄을 잡아당기고 있다. 한편, 건물주(50대)를 중심으로, 나머지 공사장 관계자와 인부들이 경건한 모습으로 서있다. 아주 신비스런 의식이다... 이때, 한 구석에 서있는 양복차림의 40대 남자, 철수를 조용히 응시하고 있다. 그의 손에는 007가방이 쥐어져 있다.
마룻대가 세워지고, 철수를 포함한 모두들이 마룻대를 향해 경건하게 서있으면, 맨 앞에 서있던 건물주가 걸어 나와 마룻대 앞에 수표 한 장을 올려놓는다. 그리고는 느리게 절을 하기 시작한다...
48. 공사현장 밖 오후 (시간 경과)
공사장 한면을 가득 메운 간이 테이블들에 놓여진 엄청난 양의 떡과 반찬들... 무슨 잔치가 벌어진 것 마냥 공사장 바깥은 시끌벅적하다. 목수들과 건축 관계자들이 막걸리와 소주를 마시며 시끄럽게 얘기하고있다. 동네 사람들도 나와서 떡을 얻어먹는다.
한편, 한쪽 구석에서는 007가방의 남자 (이하 노과장), 철수와 마주보고 서있다. 각각 손에 쥔 명함을 보는 두 남자. 멀리서 김사장이 궁금한 듯 두 남자를 응시한다. 노과장, 손에 쥔 명함을 보며 말한다. '최철수 설계사무소...'
노과장: 명함이 멋집니다.
철수: (자기 손에 쥔 명함을 보며) 아직 개업 안 했어요...
'大韓佛敎曹溪宗...' 온통 한문으로 가득 찬 명함을 중얼중얼 읽어나가는 철수...
철수: (조용히) 대한불교 조계종... 무슨 일이시죠?
노과장: 작년에 조계종 총본산 신축공모전 응모한적 있으시죠?
철수: 그거 아직도 안 지었어요? 연락이 없어서 떨어졌는 줄 알았는데...
노과장: 세계각국에서 주목하는 워낙 중요한 일이라... 계속 지연만 되다가 다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아무튼 축하드립니다.
철수: (놀라며) 제가 뽑혔나요?
노과장: 그건 아니고... 후보가 몇 업체 있어요. 마지막 관문으로 관계자들과 함께한 자리에서 발표를 좀...
철수, 얼굴이 환해진다...
49. 철수의 집 밤
큰 설탕 자루와 과일이 가득 담긴 봉투를 양손에 들고 현관문 앞에 서는 철수. 뭔가 기대감에 휩싸인 표정... 그런데 갑자기 문 아래쪽에 뭔가를 발견한다. 냄비뚜껑이다. 철수, 비스듬히 놓여있는 냄비뚜껑을 유심히 보며 생각에 잠긴다. (왜 냄비뚜껑이 문 옆에 놓여있을까?) 철수, 냄비뚜껑을 집어 들고는 초인종을 누른다. 슬그머니 열리는 문. 앞치마를 두른 수진이 철수를 바라본다. 그녀의 사랑스러운 눈빛...
수진, 철수가 집안으로 들어오는데 손에 들려있는 냄비뚜껑을 본다.
수진: 어머, 내 정신 좀 봐! 이거 어디서 찾았어?
철수, 냄비뚜껑을 건네주며 부엌으로 간다. 찬장을 열고 설탕 그릇을 꺼내는데 설탕 봉지가 이미 여러 봉지 있음을 발견한다. 대신 소금 봉지는 모두 비어있다.
철수: 혹시 소금 없지 않아?
수진: 그래서 사러 간 거 아냐?
철수, 긴가민가하며 고개를 갸웃거리며:
철수: 설탕 아니었어? 분명 설탕이라고 들었는데...
수진: (깔깔거리며) 맨날 건망증이라고 나 놀리더니, 꼴 좋다.
수진, 철수에게 하얀 가루가 담긴 유리관을 턱 건넨다.
수진: 이게 설탕이야 소금이야?
하얀 가루의 맛을 보는 철수. 한참 맛을 음미하다가:
철수: 조미료잖아?
수진: (웃으며) 자꾸 이것저것 맛보다 보니까 맛을 잘 모르겠네. 혀가 마비됐어.
철수, 짠맛에 혀를 다시며 수진을 보면, 그녀는 지긋이 눈을 감고 찌개에서 모락모락 피어 오르는 김의 냄새를 음미하고있다. 그녀의 모습이 아름답다... 이때, 갑자기...
수진: (눈을 뜨며) 응? 뭐? 나 불렀어?
철수, 걱정어린 눈빛을 감추며 수진을 가만히 바라만 본다... 그녀 조금 이상하다.
50. 길거리 (수진 부모의 집 근처) 해질 무렵
노을이 아름답게 질 무렵. 수진에게 끌려가는 철수, 과일봉투를 한 손으로 가슴에 안고있다. 둘은 달리고있다. 그들 앞에 수진 부모의 거대한 집이 보인다. 집 주변에 고급차들이 즐비하게 세워져 있다. 철수, 수진을 세우며 말한다.
철수: 나 아프다 그래.
수진, 철수를 귀엽게 노려본다.
철수: 안 가면 안돼?
수진, 말없이 철수의 손을 꽉 붙잡고는, 다시 그를 이끌고 집으로 향한다.
51. 수진 부모의 집 밤
무슨 잔치인지는 알 수 없지만, 집안에 김사장의 친척들이 잔뜩 있다. 큰 식탁 위에 놓인 진수성찬이 보이고... 그 앞에는 철수가 몹시 불편한 표정으로 앉아있다. 철수 옆에는 김사장, 그리고 중년남자들 여럿이 철수를 둘러싸고 앉아있다. 그 중 한 명이:
중년 남자1: ...그러니까, 이분이 당숙이고. 이분은 셋째 큰 아버지라고 부르면 되고. 난 수진이 둘째 작은 고모의 남편이니까... 그러니까, 내가 뭐지?
중년 남자들, 촌수를 따지며 중얼거리는 동안... 테이블 건너편에서 중년 남자들 사이에 끼어 앉아, 철수를 유심히 바라보던 여자아이, 철수에게 귀엽게 윙크한다. 철수, 여전히 불편한 표정으로 무반응...
중년 남자1: (여자아이를 가리키며) 인사 드려. 수진이 사촌고모야.
이 순간:
김사장: (술잔을 철수에게 내밀며) 생일 축하해.
철수, 술잔을 받아 마시고는 부엌쪽으로 눈을 돌린다. 부엌에 서있는 여자들 사이에, 수진이 보인다. 수진은 철수를 지켜보고 있었다...
김사장: (약간 취한 듯) 이제 외톨이 짓 그만해. 넌 이제 내 아들이야. 알았지? 난 니 아버지야. 그러니까, 아버지라고 불러. 알았지?
김사장, 갑자기 의자에서 일어나며:
김사장: 따라 와.
철수, 김사장을 따라가며, 수진을 흘겨본다. 수진, 철수에게 귀엽게 윙크를 날린다.
52. 할아버지 작업실 밤
작은 작업실 안을 걸어 들어오는 김사장과 철수. 낡은 목수 공구들이 가지런히 진열되어있는 작업실... 철수, 골동품 같은 공구들을 보며 신기해 한다.
김사장: (술 취한 말투로) 수진이 할아버지가 쓰시던 연장들이야. 7년 전에 돌아가셨지. 이건 이북에서 피난 내려오실 때 챙겨온 망치야.
철수, 김사장의 말에 귀를 귀울이며, 검은 망치 하나를 집어 들어본다. 엄청 낡았다.
김사장: 당신도 목수셨지. 나도 목수였고... 너도 목수고... 사실 난 목수란 직업을 좋아해. 예수 알지? 예수.
철수: 알죠.
김사장, 벽에 걸린 예수의 그림을 가리킨다.
김사장: (목소리 감상적으로 바뀌며) 예수도... 목수였다는 거 알아? 철수, 너 진짜목수, 가짜목수 어떻게 다른지 알아? 목재소에 가보라구. 가짜들은 말이 많아요. 나무 하나 주면, '마디가 많네, 삐뚤어졌네, 옹이투성이네,'...
김사장, 조용히 나무토막 하나를 들어 손으로 쓰다듬는다. 김사장의 말을 계속 진지하게 듣던 철수, 다시 주위를 둘러보다가 김사장이 말을 시작하자, 다시 김사장을 바라본다.
김사장: (계속) 진짜는 말야... 결을 보는 거야. 결이 뭐야? 가능성이야. 결대로 밀면 다 밀려. 그걸 볼 줄 알아야 진짜 목수라구. 사람도 마찬가지야. 넌 임마 옹이투성이었어. 지금도 옹이투성이고... 근데 난 결을 본거야. 뭔 말인지 알어, 임마?
철수, 여러 생각에 잠긴다. 김사장, 기분이 좋은지 철수를 흐믓하게 바라보다가... 낡은 검은 망치를 들어서 살펴본다. 망치의 표면을 관찰하다가:
김사장: 탐나지?
[CUT TO:]
철수, 문을 열고 할아버지 작업실을 나오는데, 수진이 밖에 서있다. 철수의 손에 검은 망치가 쥐어져 있다. 수진, 망치를 보고 철수에게 미소 짓는다... 철수, 웃으며 다른 손을 보여준다. 낡은 대패가 쥐어져 있다...
53. 철수의 작업실 - 이른 아침
철수, 낡은 대패와 검은 망치로 이전에 만들던 (절의 문양 같은) 나무장식물을 열심히 완성해 나간다... 바닥에 톱밥이 잔뜩 쌓여있다. 철수, 대패의 칼날이 어긋나자 (선물 받은) 검은 망치로 살짝 쳐서 칼날을 교정한다. '탕! 탕!' 소리가 정겹다... 대패질을 계속하는 철수... 이마에 땀이 솟는다...
땀을 닦는 철수의 모습을 과자를 먹으며 바라보는 수진. 과거 아버지 모습과 할아버지 모습이 기억이 나며 그들이 대패질하는 모습과 교차된다 Jump Cut.
철수: (목소리만) ...생각만 해도 끔찍한 기억들이지...
[DISSOLVE TO:]
54. 산속의 절 공사현장 화창한 일요일 아침
절 공사현장의 어느 목수의 대패질... 철수의 말(VOICE-OVER)이 계속 이어지는 동안...
철수: (계속/목소리만) ...맥여주고 재워준다고 맨날 이유없이 개패듯이 줘패고, 돌쇠처럼 부려먹고, 고약한 노인네...
'짹짹...' 새소리가 들리고... 절을 짓고있는 공사현장을 둘러보는 철수와 수진, 손에 도시락을 들고있다. 곳곳에 목수들과 중들이 보이고... 아직 완성이 안된 절, 거대하고 멋있다. 공간을 둘러보는 철수의 눈빛 예사롭지 않다.
철수: (계속/목소리만) ...아홉 살 때 내 고사리 손에 글쎄 망치를 쥐어주다니... 하여간 저 노인네 아니었으면 이렇게 대팻밥 먹고 살지 않았을텐데... 으휴, 저 웬수.
큰 기둥 여러 개가 눕혀져 있는 곳에 칠순의 백발노인이 쭈그리고 앉아있다. 가까이 가보면 노인은 꾸벅꾸벅 선잠을 자고있다. 상당히 늙었지만 분명 사진 속의 노인이다.
철수: 노인네 엄청 늙었네. 아이고...
백발노인(이하 사수), 눈을 갸름하게 뜨며 철수를 본다. 전혀 반가워 하지않는 표정.
사수: 밥해라, 이놈아. 배 고프다.
수진, 철수를 보며 웃는다.
[CUT TO:]
[INSERT:] 나무숲에서 뱀이 허물 벗는 순간... 신비롭다... 그 모습을 발견하는 수진... 신기하다, 근데 두 남자는 아무런 반응이 없다.
도시락을 여는 수진, 바위 위에 도시락을 가지런히 놓는다. 그 동안 사수는 귀가 어두운지 큰소리로 철수에게 말한다.
사수: 에라 이 미친놈아, 뭐하러 결혼 다 하고 찾아와? 야 이놈아, 넌 밑 다 닦고 똥누냐? 나쁜 노무시끼...
표정이 변하지 않는 철수. 수진, 터지는 웃음을 참으며, 사수에게 젓가락을 공손히 건넨다. 사수, 젓가락을 집는다. 그러나 수전증인지 사수의 손이 심하게 떨린다. 철수, 사수의 손을 바라본다. 애처롭다. 슬프다.
철수: (수진에게) 약수물 떠올게.
눈을 심하게 껌뻑이는 철수, 급히 일어나 터벅터벅 약수터로 향한다. 철수의 뒷모습을 보는 수진. (철수는 울고있는 것일까?)
사수: (수진에게 큰소리로) 이젠 진짜 죽을 때가 다됐는지 도대체 기억이 나는 게 없어. 오늘이 내일인지, 어제가 오늘인지 헷갈려. 아침을 먹었는지 저녁을 먹었는지...
수진: (큰소리로) 사실 저도 그래요!
사수: 뭐! 아니 젊은 사람이 뭔 소리야? 노인네 놀리는 거야?
수진, 미소 짓는다. 사수, 수진의 손을 만져본다.
사수: 손도 참 곱구만? 철수 애미 봤어?
수진: 예?
사수: 당신 시에미.
수진: 아니요.
사수: 철수가 인사 안 시켜?
수진: 예?
사수: 그 놈 아직도 화나 있나? 이제 좀 봐 주지. 그게 벌써 언제적 일인데. 사람이 그러면 못써. 용서할 줄 알아야 돼. 그걸 못하면 그 놈은 인생 헛사는 거야...
수진, 가만히 사수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미스터리가 조금 풀리는 느낌... 아니면 미스터리의 시작인가?)
[CUT TO:]
나란히 서있는 철수와 수진, 절 공사장 쪽으로 걸어가는 사수를 바라본다.
철수: 자주 연락드릴께요!
사수, 돌아보지도 않고 손짓만하며, 공사현장으로 터벅터벅 걸어간다. 그의 느린 걸음, 거의 풍환자 수준이다.
사수: 가봐!
철수, 과거를 후회하듯 아쉬운 표정으로 사수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철수를 쳐다보는 수진, 위로하듯 그의 허리를 감싸 안는다.
55. (옛날 그) 편의점 한가로운 오후
편의점 앞에 (전장면과 동일하게) 나란히 서있는 철수와 수진. 로맨틱한 분위기... 철수, 수진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한다.
철수: 여기 기억 나?
수진: (새치름하게) 기억 안 난다며?
철수: 기냥 한 소리지.
수진: 난 기억 안나. 난 여기 몰라.
철수: 그땐 좀...
수진: 미안했지? 미안해 할 거 몰랐어? 아니, 그런 말 할거면 진작 튕기지나 말고 가만히 있지... 왜 괜히 사람 쪽 팔리게 삽질하게 만들고 말야? 엉? 후회하지? 엉?
철수: 삽질? (웃으며) 거 어디서 배워먹은 말투야?
수진: 어디긴?
수진, 철수의 귀에다 속삭인다.
수진: (나지막이) 사랑한다 말해주면 가르쳐 주지...
철수, 대답 없이 편의점 안으로 들어간다. 수진, 약간 시무룩해지며 철수를 따라 들어간다.
편의점 안 계속
카운터 뒤에 서있는 점원이 긴장된 표정을 지으며 흘깃 보면... 철수와 수진, 반대쪽 구석에서 심각한 표정으로 마주보고 서있다.
철수: (작은 소리로) 이런 그지 같은 노인네!
수진: (작은 소리로) 그래도 살아계시다면 찾아가 인사라도 드리고 싶은데...
철수: 정말 왜 이래? 내 말 못 믿어? 남자 잘 만나 재혼해서 애두 낳고 잘살고 있대. 그게 다야. 주소도 몰라. 피차 서로 묻어버린 과거야. 지우고 싶은 과거라고. 아니, 지워진 거야. 벌써 지워졌어! 됐지?
수진: 그래도 한번은 뵙고 싶은데...
철수: 서로 잊었으면 된 거 아냐? 오늘같이 기분 째지는 날, 왜 그런 재수없는 얘기를 자꾸 해? 엉? 기분 잡치게! 에이~씨!
철수, 얼굴이 일그러지며 편의점을 서둘러 나간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수진... 철수, 편의점 밖으로 나와 어디론가 사라진다. 한편, 수진은 뭔가 결심한 듯한 표정이다...
56. 철수의 집 새벽 (며칠 후)
철수, 곤히 잠든 모습... 그리고... 자물통이 굳게 잠긴 서랍 앞에 쭈그리는 수진. 예전에 철수가 못 열어보게 한 서랍이다. (철수가 그때 이후론 자물통을 달아 놓은 듯 하다.) 수진, 준비해온 드라이버와 여러 가지 공구를 사용해 가까스로 자물통을 딴다. 도둑질하듯 모습이 아주 불안하다... 한참 후 드디어 열리는 서랍... 플래시 등을 조심스럽게 켠다.
서랍 안에는 서류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있다. 서류를 넘기다 보면, 철수의 검정고시 합격 통지서가 보이고... #$대학교 학생증... 야간... #$대학교 건축과 졸업장 등등... 과거의 은밀한 기억들이 느껴진다... 그리고 그 밑에는 또 다른 무언가를 몇 가지를 발견하고... 철수의 과거들이 하나 둘씩 보이는데... 그러다... 그 밑에 옛날 크리스마스 카드가 한 장 발견된다. 카드를 펼쳐보면...
"...메리크리스마스!...
철수야 정말 사랑해... 엄마가..."
...라고 써있고... 그리고, 카드 봉투 안에는 철수의 어머니의 젊었을 적 사진도 발견된다... 대단한 미인이다. 그리고 서류들 맨 밑에서 결정적인 단서를 발견하는 수진, 무슨 돈 관련 서류 같다. 최근 주소 같다...
이름: 오정자
생년월일: ...
주소: ...
수진, 오마담의 사진과 크리스마스 카드, 그리고 주소가 적힌 서류를 몰래 자기 가방에 챙겨 넣고 가다가 다시 돌아와, 까먹고 안 잠근 자물통을 도로 잠근다...
57. 강남 '선수촌' 골목 낮 (다음날)
수진은 메모지를 손에 들고 여기저기 둘러보며 강남의 어느 다세대 주택의 골목을 걷고있다. '선수'들이 많이 사는 동네 같다. 썬글라스에 추리닝 바람으로 걸어 다니는 늘씬한 미녀들이 곳곳에 보이고... 어느 깨끗한 다세대 주택을 지나 허름한 2층집 앞에 멈추는 수진... 드디어 집을 찾은 듯하다. 주소를 다시 확인한다. 틀림없다. 잠시 고민하다가 초인종을 누른다. 수진, 대문 앞에서 누군가 나오기를 기다리는데 갑자기 핸드폰이 울린다. 핸드폰을 가방에서 꺼내 켠다.
수진: 여보세요?
차실장: (목소리만) 나야, 차실장. 지금 어디야?
수진, 뒤로 돌아 몇 걸음 걸어간다. (대문을 등지고 선다.) 이때, 벽 너머에서 '우당탕탕' 깨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수진, 얼굴을 찡그리며, 한쪽 귀를 막는다.
수진: 저기, 잠깐 급한 일이 좀 있어서...
차실장: 오늘 회의 까먹었어?
수진: 예?
이때, 뒤에서 대문이 열리고, 머리에 수건을 두른 야리꾸리한 옷차림의 40대 후반의 여자(철수의 어머니)가 문 앞에 선다. 등돌리고 서있는 수진을 보고는 좌우를 살핀다. 아무도 없자, 철수의 어머니, 대문을 도로 닫는다!
수진: (불편한 표정으로) 무슨 회의였죠?
수진, 말을 태연하게 내뱉으며, 무의식적으로 손에 들고 있던 (주소가 적힌) 메모지를 가로로 촘촘히 접기 시작한다...
차실장: 기획실장 새로 들어왔어. 그리고, 디자인 회의.
수진: 누구에요?
차실장: 아는 사람이야. 일단 들어와.
수진: 네.
수진의 손에 접히던 메모지, 이제 얇은 이쑤시개 봉투 모양으로 변해있다. 수진, 골목을 나서며 핸드폰을 끈다. 그리고 손에든 메모지를 땅바닥에 무심코 그냥 버린다. 충격적이다.
[INSERT:] 수진, 곧장 큰길로 나와 택시를 잡는다.
58. 수진의 의류회사 오후
밝은 표정으로 사무실 안에 들어오는 수진. 마침 커피를 들고 걸어오던 차실장과 마주친다.
차실장: (커피 한 모금 마시며) 이거 굿 뉴스인지, 배드 뉴스인지 모르겠네.
수진: 예?
[CUT TO:]
유난히 조용한 사무실 내부... 수진이 굳은 표정으로 한쪽 코너에 위치한 기획실장 방 쪽으로 걷고있다. '또각 또각...' 그녀의 하이힐 소리만 유일하게 들린다. 사무실 안의 모두가 그녀를 '흥미롭게' 주시한다. 방 앞에 도착하는 수진, 기획실장 방 문지방에 기대 선다.
책상 앞에는 안나 정이 요염하게 다리를 꼬고 앉아있다. 책상 뒷편엔 멋진 양복차림의 30대 중반의 미남이 앉아있다. 서용준실장(이전 아파트 씬의 사진 속의 남자)이다. 서용준과 안나 정은 농담을 나누던 중...
서용준은 수진을 보고는 조심스레 미소를 던진다. 웃고있던 안나 정, 수진을 보고는 얼굴이 차가워진다. 안나 정, 느리게 일어나 사무실을 나가며, 수진을 한번 노려본다. 방안으로 들어가기 직전, 수진은 갑자기 고개 돌려 사무실 밖을 살핀다. 그녀를 훔쳐보던 몇몇의 직원들이 급하게 고개를 돌린다.
용준: (유창한 불어로) Fermer la porte. [문 닫을까?]
수진, 방안으로 조용히 들어오며 문을 닫는다. '딸칵' 닫히는 문. 적막이 흐른다. 수진, 문에 기대며 두 손을 팔짱 낀다. (한편, 옆방에선 여직원 몇 명이 조용히 모이기 시작한다. 한 명은 심지어 귀를 벽에 갖다 댄다.)
용준: S'assied. [앉아.]
수진: 서있을께요.
용준, 잠시 수진을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수진에게 다가간다. 그리고 조용히 말한다.
용준: 나 이번에 들어왔어. 파리 생활 접고, 지사도 철수하고.
수진: 들었어요.
용준: 다시 같이 일하게 됐네? (수진이 대답 없자) 우리 살던 아파트로 도로 들어갔어. 자기 것만 챙겨 갔더군. 혹시 우리사진 남은 거 있어? (수진 여전히 대답이 없자) 입장이 바뀌었네? 난 돌아온 총각... 넌 유부녀... 이것도 운명의 장난인가?
수진, 할말이 없는 듯, 가만히 용준만 쳐다본다.
용준: (속삭이듯) 건축가라고 들었어.
수진: 모두 샘플 실에서 실장님 기다리고 있어요.
용준, 난색의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용준: (한숨 쉬며) 있잖아. 그때 왜 못 갔냐면...
수진: (차갑게) 알고 싶지 않아요.
용준: (표정이 굳어지며) 알고 싶지 않어?
수진: 제가 그걸 왜 알고 싶겠어요? 다 끝난 일을. 전 아무것도 기억 안나요. 샘플실에서 뵙겠습니다.
수진, 씁쓸한 미소를 짓고는 용준의 방을 나간다.
59. 철수의 집, 작업실 밤
고요한 작업실 안. 작업실 한 가운데에는 막 작업을 마친듯한 (고전적이면서도 현대적인 느낌이 조화를 이루는) 건물의 모형이 보인다. 모형의 지붕을 들어올리는 철수... 건물 안의 벽들과 공간이 소개된다. 철수는 러닝 차림이다. 철수를 마주보고 수진이 스툴(높은 의자)에 앉아있는데, 수진은 철수의 양복을 입고 남자처럼 머리를 뒤로 빗었다. 헐렁한 양복이 어색하지만, 다리를 멋지게 꼬고있는 자태가 조금 섹시하기도 하다. (둘은 뭘 하고있는 것일까?) 수진, 몸을 기울여 모형을 만지려는데...
철수: 아직 안 말랐습니다. 만지지 마십쇼.
수진, 뒤로 자세를 잡으며, 생각에 잠기다가...
수진: (굵은 목소리로) 컨셉을 한번 얘기해 보시죠?
철수: 컨셉이요?
수진: 디자인이 어디서 출발하셨냐구요?
철수: (머리를 긁적이며) 어디서 출발했냐구요?
수진: 예... 그러니까... 어디서 영감을 얻으셨냐 이거죠.
철수: 영감이라... 영감은... (한참 후) 과거의 기억들이죠 뭐... 이것저것... 기억의 집합체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요즘엔 건설현장에서 빌딩을 높게 높게 지으며 먹고 살지만... 좀... 따분해요. 전 집이란 걸 절 짓던 목수한테서 배웠습니다. 절 지을 때 못을 안 쓰는 거 아시죠?
수진: 그래요? 몰랐어요.
철수: 못은 녹이 슬어서 좀 지나면 기둥이나 이음새가 헐렁거려요. 근데 나무는, 처음에 깎아 맞추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나중에는 (깍지를 깊숙이 끼워 잘 빠지지 않는 동작을 보여주며) 아주 단단하게 맞물리거든요. 그래서 아무나 못하죠. 저도 포기했으니까요...
수진: 왜요?
넋을 잃고 철수의 말을 듣던 수진, 턱을 손바닥에 기대고 다음 말을 기다린다. 철수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 사랑에 가득 차있다.
수진: (살며시 미소 지으며) 계속해봐. 왜 포기했어?
철수, 말없이 수진을 쳐다본다. 둘 사이에 오가는 눈빛, 강렬하면서도 평화롭다...
60. 조계종 총본산 신축공모전 발표실 낮
철수: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수줍게 만들어 보이며) 수지타산이 안 맞아서요.
남자들 목소리: 하하하!
철수 앞에는 앞서 소개된 건물의 모형이 놓여있다. 그리고 반대편에는 긴 테이블에 조계종 관계자들과 스님들, 그리고 노과장과 여러 건축계 인사들이 나란히 앉아 (웃으며) 모형을 유심히 보고 있다. 심지어는 유럽에서 온 중들도 몇 있다. 긴장되는 분위기지만, 철수는 특유의 열정으로 발표를 진행해 나간다.
철수: ...옛날 것과 요즘 것을 나름대로 섞어 보았는데 괜찮은지 모르겠네요...
[INSERT: 철수의 집에서] 그날 아침: 철수의 어깨 뒤에서 뱀처럼 넘어오는 수진의 두 손, 넥타이를 조여 매고... 철수의 손목엔 커프링크(cufflinks)까지... 철수에게 완벽한 복장을 입히는 수진의 모습... 흐믓하다.)
다시 발표실: 철수, 이마엔 땀이 고여있다. 물잔의 물을 마시며, 이마의 땀을 닦는다. 복장이 약간 불편한지, 목을 조인 넥타이를 약간 풀며, 손목에 찬 여전히 생소한 느낌의 커프링크를 만져보다가... 불현듯 뭔가가 생각났는지 테이블 밑에서 뭔가를 집어 올린다. 창호지 포장을 뜯어내면, 철수가 오래 전부터 작업하던 고전적 장식물이다. 심사위원들... 모두 놀라는 표정...
철수: (계속) ...이게 기둥과 기둥 사이에 있는 보 밑에 장착할 장식입니다. 이건 제가 직접 했습니다. 좀 오래 걸렸죠. 실제 건물에 붙는 장식은 전부다 수작업으로 할 계획인데요. 저 외에도 제 옛날 사수를 비롯한 목수 여러 명이... 거의 뭐 인간문화재 수준의 장인들이 달라붙어서 작업한다면, 준공날짜는 맞출 수 있다고 봅니다. 노인네들이 죽지만 않으면요...
모두: 하하하!...
[CUT TO: 복도]
들고 온 짐들을 혼자 들고 복도로 나가는 철수를 누군가 따라온다. 노과장과 '공무원'틱한 외모의 남자다. 철수, 그들을 마주보고 눈인사 한다. 양손엔 여전히 짐이 가득...
공무원: (환한 얼굴로) 반갑습니다. 바로 우리가 찾던 분을 바로 여기서 이렇게 만나게 돼서.
철수: (퉁명스럽게) 누가 절 찾아요?
노과장: (웃으며) 문화 관광부에서 나오셨어요.
공무원: 대한건축사협회랑 같이 일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젊고 세련되신 분께서 사라져만 가고 있는 우리 목조기술의 전통을 되살리시겠다니...
철수: 제가 그런 말을 했나요?
철수, 다시 걸으려는데...
공무원: 잠깐만요! 요즘 우리나라 사람들, 온통 서구적인 것만 좋아하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특이한 분들을 찾아 다니자니, 다들 현실과 담을 쌓고 살고있고... 깝깝하죠. 안 그래요?
철수: 요점이 뭡니까?
공무원: 저희들은 아주 오래 전부터 국립 목조기술 박물관 설립을 추진해왔는데요. 바로 '딱'입니다. 딱! 여태껏 여기 계셨습니까?
노과장과 공무원, 환하게 웃는다. 철수, 멍한 표정...
61. 사진 스튜디오 오후
한편, 핸드폰 통화를 하고 있던 수진, 기쁜 표정으로 점프를 한다.
수진: 얏호!
사진작가: 수진씨, 좀 찍자! 엉!
수진, 미소 지으며 빙그르 돌아서면, 패션 사진작가가 사진 찍을 준비가 다 돼있다. 세트 안에는 강렬한 조명을 받고 서있는 남자모델이 수진을 지켜보고 있다. (남자모델, 수진의 회사가 디자인한 정장을 입고있다.)
남자모델: (수진에게) 이렇게, '마이클 조던'처럼요?
남자모델, 들고있던 농구공을 튕기며 '덩크슛'하는 시늉을 한다.
수진: 아니, 그건 너무 흔한 이미지구요. 것 보담은, 음, 왜 쟁반을 들고 오던 웨이터가 발에 걸려 자빠질 때처럼, 약간 돌연하게, 돌발적으로 확 넣는 거죠. 어떤 상황에서도 유연하게 받쳐준다, 이런 느낌이 나도록요.
사진작가와 모델, 약간 갸우뚱하며 한참 생각한다. '퉁퉁퉁...' 농구공을 느리게 튕기던 남자모델, 순간 농구공을 들고 약간 어설프게 한쪽 발은 땅에 딛고 다른 한쪽 발은 높이 치켜들며 점프한다. 몸은 약간 왼쪽으로 기울어지고 오른손만 높이 솟구친다. 사진기가 '찰칵'하며 스틸이미지로 바뀐다... [카메라, 정지된 스틸사진에서 계속 빠지면서...] [멀리 파티 음악소리가 들려오고...]
62. 청담동 "rave party" 현장 밤
[...카메라, 스틸사진에서 계속 빠지면...] 스틸사진은 크게 확대된 포스터 사진으로 되어 벽에 높이 걸려있고... 파티 음악은 크게 들리고. 그 밑에는 "@#$% 브랜드 LAUNCHING PARTY"라고 영어로 크게 새겨져 있다. 바(bar)쪽에 기대선 철수, 포스터를 뿌듯한 표정으로 높이 올려다 보고 있다.
[INSERT: 철수의 집] 따스한 'magic hour'의 햇살... 긴 거울 앞에 서있는 수진, 예쁜 파티 드레스를 입고 있다. 철수, 코르셋의 후크 단추를 하나씩 잠근다. 촘촘히 붙어있는 수십 개의 후크 단추, 정말 좀 쑤시고 짜증이 난다...
다시 파티장: 철수, 파티 장 안을 둘러보면 현란한 분위기의 레이브 파티가 한창이다. 전혀 익숙치 않은 분위기의 파티장이다. 여자들은 모두 동양적 에스닉(ethnic) 코드의 드레스를 입고있다. 여러 패션 모델들이 열심히 섹시하게 춤을 추고 있는 가운데... 파티 분위기 전체가 데카당스(decadence)하다. 바에 철수 차례가 오고, 그는 바텐더와 마주본다.
바텐더: (큰소리로) '미도뤼 싸우워 앤 뤔 아니면 봐드카 크뢘베리'중 뭐 드시겠습니까!
철수: (짜증, 난감) 아무거나 주쇼!
바텐더가 능숙하게 술을 만드는 동안...
[INSERT: 다시 철수의 집] 철수, 거울 속의 드레스 입은 수진을 감상한다... 그러나, 수진 고개를 저으며 딴 옷을 집어 든다. 다시 촘촘한 후크 단추들을 풀기 시작하는 철수,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다듬는다...
다시 파티장: 철수, 이름도 맛도 모르는 술 두 잔을 들고 파티장을 대각선으로 가로질러 걷고있다. 철수의 옷은 파티에 잘 어울리지 않는다. 불편한 표정으로, 멀리 보이는 수진을 향해 걸어가는데, 사람들의 대화소리가 귀에 들린다. ('The Great Gatsby'에나 나올법한 껍데기뿐인 대화소리 뿐...)
파티 여1: 쟤 어제 파티에서 봤어?
파티 여2: 정말 골 때리는 옷 입고 왔지 않니?
파티 남1: (가식적으로) Hey Jenny! 옷 너무 이쁘다!
철수, 수진과 친구들이 앉아있는 파티 구석자리에 합석한다. 수진, 결국 이상한 파티의상을 입고있다.
윤아: (문득 수진의 옷을 가리키며) 너 이게 뭐냐? 오늘 '에스닉'이잖아?
수진: 어, 그랬어?
지현: 이건 '믹스 앤 매치'도 아니고... 뭐냐? 너 요즘 옷이 촌시려지는데, 진짜 아줌마 다됐다. 엉?
철수, 수진과 친구들을 보면 모두 같은 잡지 한 권씩이 쥐어져 있다. 건축학계의 고급잡지다. 잡지표지에는 양복차림의 철수가 어색하게 건물 모형을 들고 찍은 사진이 실려있다. 얼굴 표정이 쑥스럽다. 철수, 잡지를 수진의 손에서 잡아당기며 귀에다 속삭인다.
철수: 거 좀 치우자. 쪽 팔리게 왜 이래?
수진: (귀엽게) 왜~~! 이리 내!
윤아: (잡지표지를 보이며) 멋지신데요!
철수: 아직 말뚝도 안 박았어요.
윤아: 예?
수진: (윤아에게) 시작도 안했다구!
지현: 수진이 노가다 다됐다, 그치?
수진: (주먹을불끈 쥐며) 이씨! 삽질하고 있어!
철수, 기가 막힌 듯 웃음을 참으며 술을 홀짝 마신다. 곧 이어, 수진의 친구들의 기관단총 같은 수다가 쉴새 없이 쏟아져 나온다. 철수, 사방을 둘러보면 모두들 웃으며 들떠있는 모습이다. 철수는 불편하다. 그의 경직되고 숨막혀 하는 모습을 발견하는 수진.
수진: (귓속말로) 우리 나갈까?
철수: (귓속말로) 여기 있는 인간들은... 뭐가 그리 즐거워?
수진: (귓속말로) 별거 아니야. 그냥 다 허세야. 사실 서로에게 아무 애정도 없어. 다 서로가 서로를 시기하고 부러워하지.
철수: (귓속말로) 별거 아니라고? 별게 아니라고 얘기 하는 넌... 참, 그걸 알고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거야. 난 그런 것도 모르니까.
철수, 잡지표지의 어색한 자기 모습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한다.
철수: 내가 이런 옷 입는 게 좋아?
수진, 의아한 표정으로 철수를 바라본다. 이때,
수진의 친구들: 야, 춤추러 나가자. 나가자!
철수만 남고 여자 네 명 모두 춤추러 나간다...
댄스 바닥에서, 수진은 예쁘게 춤을 추며 철수를 계속 힐끗힐끗 주시한다. 철수, 수진의 춤추는 모습을 바라보며, 술을 홀짝 마신다. 수진, 뭘 하든 어떻게 움직이든, 아름답다... 이때, 다른 구석에서 용준이 남자모델들을 이끌고 수진과 친구들 쪽으로 간다. 수진 앞에 용준이 선다. 용준이 수진에게 뭐라고 속삭인다. 순식간에 뭔가를 직감한 철수, 굳은 얼굴로,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수진 쪽으로 간다...
용준을 마주보고 서는 철수, 무표정하다. 두 남자, 드디어 만나게 된다. 수진과 친구들 모두 불안한 표정... 두 남자 사이에 선 수진, 철수와 용준을 번갈아 본다. 철수, 수진의 손을 강하게 붙잡으며, 자기 뒤로 수진을 숨기듯 당긴다. 용준을 계속 무표정하게 응시하던 철수, 용준에게 결국 악수를 권한다. 악수를 하는 두 사람. 말이 없다.
그리고 철수는 수진의 손을 잡고 아무에게도 인사도 않고 곧장 파티장 밖으로 나간다...
63. 철수의 집 아침
잠옷 차림의 철수, 머리가 삐죽삐죽 봉두난발... 소파에 앉아 (출근 직전의) 수진을 바라보고 있다. 연필을 손에 쥔 수진, 뭔가를 열심히 서성이며 찾는다. 집안을 빙글빙글 돌며 뭔가를 찾는 수진... 도대체 뭘 찾는 것일까?
철수: (여기저기 헤매고 있는 수진에게) 대체 뭘 찾는 거야?
수진: 엉?
수진, 잠자코 있다가... 씨익 웃는다.
수진: 몰라. 까먹었네. 뭘 찾았지? 아이참...
수진, 철수를 보더니 이상하게 자꾸 터지는 웃음을 참는다. 카메라, 철수 얼굴을 보면, 얼굴에 온통 키스자국이다. 그러나 철수, 표정에는 근심과 걱정이 오간다. 점점 심해져만 가는 수진의 건망증 때문에...
[CUT TO:]
화장실 거울에 비친 얼굴의 키스자국들을 보면서 웃는 철수. 빠르게 문을 박차고 나가면, 수진 서둘러 현관을 나서며 도망친다...
64. 고급 커피샵 - 점심시간
수진과 친구들(윤아, 지현, 명주)이 모여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다. 수진, 여전히 철수가 표지에 나온 잡지를 보고 있다. 윤아는 섹시한 작업복차림. 목에 줄자를 두르고 있고... (모두 작업하다가 잠깐 커피 마시러 나온 분위기.) 수진의 표정, 싱글벙글이다.
윤아: 입 찢어지겠다. 너, 시집가니까 그렇게 좋냐?
수진: 니들도 시집가봐. 죽여.
윤아: 뭐가 그리 죽여주냐? '노가다'틱한 면? 아니면 '건축가'틱한 면?
수진, 잠시 생각에 잠긴다...
[INSERT:] 문지방 기대어 서있는 철수에 매달려있는 수진. 다리도 그의 허리를 휘감고있다. 둘은 서로 웃으며 쳐다보고있다. 철수는 마치 자기 힘을 과시하는 표정... 그리고 수진은 그 힘을 시험해보는 표정. 어린아이 같은 두 사람.
수진: (웃으며) '노가다'틱한 면...
명주: 왜?
수진: (나지막이) 힘이 무진장 쎄걸랑!
모두: 하하하... 호호호...
명주: 이야, 이젠 수진이도 밝힌다?
지현: (수진이메고있는 가방을 보며) 야, 가방 좀 내려 놀래? 누가 안 집어가!
커피를 홀짝 마시는 수진.
수진: (여전히 밝은 표정으로) 너희들 그런 적 있어? 매일 가던 길 갑자기 헷갈릴 때...
윤아: 우리가 뭐 너 같은 줄 아냐?
명주: (윤아에게) 야, 너도 '길치'잖아?
윤아: 적어도 맨날 다니던 회사 찾아 헤매진 않는다. 그건 좀 심하지 않냐? 노망든 할머니도 아니고...
수진: (시무룩하게) 요즘... 집을 잘 못 찾아 가겠어. 이상해...
친구들 잠시 가만히 있다가, 크게 웃는다. 수진도 어색하게 함께 웃는다. 카메라, 서서히 빠지는 동안 수진은 (처음부터 메고있던)가방을 고쳐 멘다...
65. 수진의 회사 나른한 오후
가만히 책상 앞에 앉아 다이어리에 그림을 그리는 수진, 그림은 철수의 얼굴이다... 모두 어디 갔는지 기획실 안은 텅 비어있고 수진만 혼자 남아있다. 문득 인기척에 고개를 들면 용준이 건너편 자기 방에서 수진을 물끄러미 바라보고있다... 약간 놀라는 수진, 그의 시선을 피하며 급히 일어선다.
[INSERT:] 철수의 집 주변... 골목을 헤매는 수진 POV. 전봇대, 전깃줄, 쓰레기 콘테이너... 가로수... 등등... 여러 장면이 몽타쥬로 보여진다... 다시 해가 지며 날이 저문다... 약간 초현실적인 느낌...
66. 철수와 수진의 집 밤
길 주변을 좌우상하로 살피다가 자기 집 앞에 서게 되는 수진. 현관문을 관찰한다. 맞는 것 같다는 표정을 혼자 짓는 수진, 곧 열쇠로 문을 따고 문을 연다... 집안으로 들어오면 익숙한 공간이다... 그런데 부엌을 지나치다가 갑자기 멈춰 선다. 부엌의 인테리어가 완전히 새롭게 변해있다. 아주 아름답다... 헷갈리기 시작하는 수진. 식탁 위에 철수의 낡은 공구벨트가 놓여져 있다. 수진이 긴가민가하며 서성일 때, 막 샤워를 마친 철수가 몸에 가운만 걸친 채 화장실에서 걸어 나온다. 화장실에선 김이 모락모락 나오고 있고... 분위기 묘하다... 철수, 그 특유의 번뜩이는 눈빛으로 수진을 바라본다.
수진: (부엌을 신기하게 둘러보며) 뭐가 좀... 이상해.
철수: (미소 지으며) 뭐가?
수진: 부엌이...
철수: 부엌이 뭐가?
수진: 부엌이 변했어... 변한 건가... 변한 거야?
철수, 아무 대답 없이 수진을 바라본다. 수진, 이때 갑자기 뭔가 깨달은 표정으로 환하게 미소 짓는다. 수진, 부엌 안으로 걸어가 새로운 가구들을 만지며 부드러운 촉감을 느낀다. 수진, 철수를 바라보다가 미소를 띄우며 찬장을 여기저기 찬장을 열어본다. 안의 내용물들도 정리정돈이 완벽히 되어있다. 수진, 눈물을 글썽이자...
철수: 좋아?
수진: 아니... 사랑해.
철수, 무표정하게 수진에게 다가간다. 수진, 의아한 표정... 철수가 바로 앞에 서자, 수진 긴장한다. 철수, 수진을 들어올려 싱크대에 앉힌다. 수진은 곧 그녀의 다리를 철수의 허리를 감싸며 부드럽게 철수의 목을 껴안는다. 철수, 눈물을 글썽이는 수진의 두 눈을 보며 속삭인다.
철수: 부모를... 잃었어? 나라를 잃었어?
수진, 미소 지으며 훌쩍인다. 철수, 수진에게 키스를 한다. 지속되는 두 사람의 감미로운 키스... 수진의 눈망울 속에 별들이 보인다.
[INSERT:] 밤하늘 빛나는 별의 TIME-LAPSE SHOT 찍어놓으면 어떻게 보일까?.
67. 백화점 마케팅 회의실 낮
계약서에 도장을 찍는 과정. 백화점 관계자1과 서용준실장이 여러 장의 계약서를 서로 분주히 주고받으며 도장을 찍고있다 특이한 스타일의 한국식 도장찍기. 근처엔 기쁜 표정을 짓고있는 수진이 보인다. 그리고 그들 뒤에는 안나 정이 팔짱을 끼고 서서 그 과정을 지켜보고 있다. (안나 정은 입이 삐쭉삐쭉, 똥씹은 표정이다. 수진이 계속 못마땅하다...)
조대리: (수진이 대각선으로 메고 있는 가방을 가리키며) 그거 안 거추장스러워요? 아까부터 매고 계시네?
수진: (웃으며) 괜찮아요.
도장 찍기가 끝나고 모두들 서로 악수를 한다.
용준: (관계자1에게) 지금부터가 시작이죠?
백화점 관계자1: 우리도 제발 대박 한번 냅시다!
용준, 계약서를 수진에게 건네며 말한다.
용준: 잘 챙겨.
수진: (재치 있게) 중요한건가요?
모두들: 하하하!
수진, 마냥 흐믓하다... 용준이 수진에게 악수를 청한다. 안나 정과 직원1, 악수하는 두 사람을 심상치 않은 눈으로 쳐다본다. 용준이 수진을 보는 눈도 예사롭지 않다. 수진, 용준이 자기 손을 오랫동안 놓지않자, 계속 웃으며 다른 손으로 떼어낸다...
68. 숲속의 푸른 언덕 오후
아주 고요한 느낌으로... ['짹짹...' 새들과 벌레소리가 평화롭게 들려오고...]
빙글빙글 도는 나침반의 바늘이 보이고...
무척 평온한 표정의 철수, 언덕 한가운데 서서 나침반으로 방향을 둘러보고있다. 하늘을 보면 태양이 바로 위에 보인다. 철수, 여전히 나침반을 손에 들고 멍하니 주위를 둘러본다. 그리고 가만히 상상 속에 잠긴다...
철수, 언덕 위에 서서 집을 상상하는 모습 상상이 형상화되는 재미있는장면.... 그가 고개를 돌리는 순간, 기억의 잔상들이 그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느리게 걸음을 걸으며 주변을 둘러보면 눈앞에 이미지들이 보인다... 거실에 앉아 있는 수진의 친척들의 행복한 모습... 부엌에서 미소 짓는 수진과 수진의 엄마. 그리고 다른 코너에서 벽에 망치질하며 사진을 거는 김사장의 모습... 계단 위에서 그를 부르는 수진... 또 바로 옆을 보면 수진이 자신(그러나 다른 몸)에게 안긴 채로 어디론 가로 옮겨지는데, 그에게 빨리오라고 손짓한다. 이런 형상들이 보이며 기둥과 벽, 그리고 여러 공간들이 만들어지고 또 나뉘어진다. 철수, 그러다 고개를 다시 돌리면 이미지의 잔상들이 사라져있다. 곰곰이 생각을 하며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인다... 그리고, 나침반을 내려다본다...
69. 수진의 의류회사 기획실 오후
흐믓한 표정들... 직원들 모두 표정이 밝다. 자기 책상에 앉아 서류정리를 열심히 하고있는 수진이 보인다. 멀리 서있던 안나 정, 책상서류정리를 하고있는 수진의 책상 위에 놓인 계약서를 주시하고있다. 수진에게 다가와 속삭이는 한 직원:
직원1: (조용히) 사실 다들 안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이 부서는 앞으로 일년은 더 살아있을거라는데? 덕분에 일년간 카드연체는 면했어!
수진, 흐믓하게 미소 지으며 계속 서류정리를 한다.
한편, 용준의 방에선:
안나 정: 축하해요, 용준씨. 오늘 한잔 어때요?
안나 정, 의자에 앉아있는 용준의 무릎에 자기 다리를 야하게 문대며, 용준의 귀를 만진다. 용준, 불편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방을 나간다. 얼굴이 일그러지는 안나 정.
다시 기획실:
용준이 자기 방에서 나와 기획실 쪽으로 간다. 그리고 수진의 책상에 걸터앉는다. 용준, 표정이 마냥 환하다. 이때 수진, 주변을 둘러보면 직원들이 자기와 용준을 흘겨보고 있다. 수진, 약간 불편하지만 내색하지 않으며 미소 짓는다.
용준: 오늘 끝나고 회식이야. 계약서 가지고 있지? 좀 줘봐.
수진, 환한 얼굴로 책상서랍을 연다. 그런데 갑자기 얼굴이 굳는다. 자신의 핸드백을 열어보는 수진, 표정이 심각해진다. 수진, 서둘러 책상을 뒤지기 시작한다. 용준과 직원1, 수진의 행동을 의아하게 쳐다본다. 수진, 책상 밑으로도 기어들어가 구석구석을 뒤지기도 한다. 수진 책상 옆으로 일어서는 용준, 그녀의 이상한 행동을 약간 의심스럽게 지켜본다.
용준: 왜 그래?
당황하는 수진, 대답 없이 책상 위를 다시 뒤지기 시작한다. 미친 듯이... 이때, 수진이 허둥지둥 계약서를 찾다가 그만 핸드백에 있던 오마담의 크리스마스 카드와 사진, 그리고 관련 서류들이 수진이 앞서 정리하고있던 옛날 서류 무더기 속에 파묻힌다!
수진: (허둥지둥) 어... 계약서가 안보이네...
용준: 뭐?
직원1: 없어졌어? 방금 전에도 들고있었잖아요?
용준: (화를 참으며 차근차근) 내일3시에... 그 계약서를 제시해야지만... 투자사가 선금을 내놓는 거, 잘 알고있지?
수진이 다급히 책상서랍을 다시 뒤지는데. 모든 직원들 긴장하며 자기 책상들도 뒤져본다. 이를 구석에서 지켜보는 안나 정,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비웃듯 '씨익' 미소 짓는다. 모두들 불안한 표정으로 수진을 주시하는데... 이때,
직원2: 이거 아니에요? 쓰레기통에 있네?
직원2, 계약서를 들어 보인다. 계약서는 구겨지고 찢어지고, 상태가 충격적이다. 모두들 말을 잃고 계약서를 쳐다본다. 용준, 몹시 화난 얼굴로, 너덜너덜한 계약서를 조심스레 살핀다. 그리고 구겨진 부분을 안타깝게 피며 조용히 말한다.
용준: 누가 한 짓인지 몰라도... 참...
용준, 수진을 쏘아보며 말한다.
용준: 할말이 없다...
예전부터 수진에게 화가 단단히 나있던 안나 정, 순간 갑자기 수진의 옷깃을 움켜잡고 그녀를 사무실 밖으로 끌고 나간다. 용준, 차실장, 그리고 여러 직원들, 두 여자를 급히 따라나간다.
사무실 복도에선:
벽에 수진을 강하게 밀어붙이는 안나 정.
안나 정: 너 쪽팔리지도 않니? 나도 여자지만, 김수진, 너! 공과 사는 분명히 해야 되는 거 아냐? 다 너 같은 년들 때문에 우리 여자들이 욕 먹는 거야! 살림 두 번 차리니까 정신이 없냐? 미친년. 왜? 왜 엉뚱한 데다 화풀이야? 계약서가 무슨 죄가 있어?
'촥!...' 안나 정의 따귀를 힘껏 때리는 수진. 안나 정, 눈을 부라리며 달려드는 데, 연속으로3번을 수진에게 따귀를 맞는다. 다시 덤비려는데 차실장과 직원들이 붙잡으며 말린다.
화를 누그러뜨리지 못하는 수진, 분노어린 눈빛으로 안나 정을 쳐다본다. [수진의 시선: 다시 서서히 좁혀지기 시작한다... 무슨 증상일까?] 일그러진 안나 정의 얼굴, 정말 추하다... 용준, 이때 수진에게 다가와 위로하며 부드럽게 말한다. [그러나, 목소리는 '윙윙' 울리며 들린다...]
용준: (윙윙...) 진정해. 수진아. 걱정 마. 내일 다시 잘 부탁하면 될 거야...
수진, 들은 척 않고 자기 책상 쪽으로 뛰어간다.
다시 기획실로:
이때, 사무실 직원들 모두 수진을 쳐다보고 있다. 수진, 어지러움을 떨치려 깊은 숨을 한번 내쉬고는 주위를 둘러본다.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멀리 서용준도 가만히 서있다. 수진, 자기 책상 앞으로 간다.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집어 든다. 씩씩거리며 번호를 누르자, 신호음이 들린다. 수진, 복잡하고 초조한 표정... 몸이 부르르 떨린다... 숨을 크게 내쉬며 눈을 감으며 안정을 되찾으려고 노력한다...
숲속의 푸른 언덕 오후
핸드폰을 켜며 전화를 받는 철수:
철수: (핸드폰을 붙들고) 여보세요? 수진이? 어? 무슨 일이야? 뭐? 어!...
철수, 황급히 달리기 시작한다. 철수, 순식간에 언덕너머로 사라진다.
70. 종합병원 신경학과 복도 해질 무렵
초록빛 형광조명아래의 넓은 병원 복도... 곳곳에 환자들과 간호사들, 의사들이 말없이 걸어 다니고... 발소리만 울려 퍼지는데... 왠지 기분이 으스스하다... 벽에 붙어있는 벤치에 나란히 앉아있는 철수와 수진이 보인다. 철수의 팔은 수진의 어깨를 감싸고있다. 수진은 힘없이 철수의 어깨에 기대고있다. 움직임 없는 둘은 한참을 앉아있었던 것 같다.
철수, 불안함을 감추며, 수진에게 미소 지으며 말한다.
철수: (태연하게) 괜찮을 거야. 이따가 뭐 먹을까?
'신경과' 방의 문이 열리며 간호사가 나온다. 들고있던 명부를 한번 살피고는...
간호사1: 김수진씨?
철수와 수진, 일어나서 문으로 향하는데,
간호사1: 본인만 들어가셔야 됩니다.
수진, 철수를 본다. 철수, 수진을 보며 고개를 살짝 끄덕인다.
철수: 여기서 기다릴게.
수진, 철수의 (거친)손을 한번 만져보고는, 간호사를 따라 방 안으로 들어간다.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철수, 걱정이 된다. 문이 닫힌다.
71. 신경과 의사의 방/진료실 계속
불안한 표정으로 진료실 안에 들어가는 수진. 의사가 방안에 안 보인다. 수진, 곧 책상 밑에 빠져 나온 손을 발견한다. 의사는 책상 아래서 전기선을 꼽고있다. 플러그를 꼽는 순간, '왱!...'하며 책상 위에 전기면도기가 돌아가기 시작한다. 서둘러 몸을 일으키던 의사, 책상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힌다.
이박사: 아이고... 내 머리!
이박사(50대), 머리를 촐싹맞게 긁적이며 일어나 자리에 안는다.
이박사: 뭐해요? 앉아요.
이박사를 마주보고 앉는 수진, 계속 그를 관찰한다. 단정치 못한 머리. 때가 꼬질꼬질한 옷깃... 이 사람이 의사인가?
다시 병원 복도 (교차편집):
벤치에 계속 앉아있는 철수, 가방에서 스케치북을 꺼낸다.
다시 신경과 의사의 방/진료실 (교차편집):
한편, 이박사는 돋보기 안경을 쓰고 눈을 찡그리며 손에든 휴대용 녹음기를 열심히 살핀다. 작은 녹음테이프를 앞뒤로 살피는데, 이박사의 혀가 자신도 모르게 한쪽으로 흘러나온다. 수진, 의사의 행동에 웃음이 나오지만 억지로 참는다. 이박사, 서투른 손놀림으로 녹음 버튼을 누르며 말한다.
이박사: 지난 몇 년간, 심하게 견디기 힘들었던 스트레스나... 정신적인 고통으로 현기증이나 정신을 잃고 쓰러진 경우가 혹시 있나요?
녹음기를 책상 위에 놓는 이박사. 마이크가 수진 쪽을 향하게 한다. 수진, 긴장이 조금 풀린듯하지만, 녹음기가 눈에 좀 거슬린다.
수진: 스트레스요? 잘 모르겠는데요. 없는 것 같아요... 한번 크게 실연당했던 것 빼고는요. 녹음을 꼭 하셔야 되나요?
이박사, 노트에 뭔가를 적으며 말한다. (그의 말투는 좀 '편집증'적이고 독특하다.)
이박사: 거 나중에 도움이 될 거니까... 이건 신경 쓰지 말고, 내 질문에 대답만 하세요. 그게 어떤 경험들이었습니까? 좀 구체적으로 말해 봐요.
수진: 구체적으로요?
수진, '말을 할까 말까'하는 표정... 머뭇대다 말을 시작한다.
수진: 유부남을 사랑했었는데... 기차역에... 약속장소에 나타나지 않았어요. 가슴이 너무 아파 죽고싶었어요... 그때는. 그리고, 그 일이 있기 며칠 전엔... 그 사람 부인에게 붙잡혀 머리가 이만큼 뽑히고... 쥐어 뜯기고...
이박사: (갑자기) 푸하!...
이박사 웃는다, 그러나 곧 웃음을 참는다. 수진, 약간 기분이 상한 표정.
이박사: (점잖게) 미안합니다. 겪으신 일이 웃긴 게 아니고, 말씀하시는 어조가 너무 남 얘기하듯이 말씀하셔서...
수진도, 피식 웃는다.
다시 병원 복도 (교차편집):
한편, 수진을 기다리는 철수는 복도 벤치에 계속 앉아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리고 있다. 빠르게 대충 스케치 되는 '언덕 위의 집'... 과감한 디자인... 벌써 여러 버전이 그려져있다... 공간에 대한 깊은 고찰이 느껴진다. 철수, 복도를 느리게 둘러본다. 공간의 구석구석을 관찰한다... 천정, 코너, 문, 타일, 등등...
철수, 다시 스케치를 한다. 빠르게 그리는 그림이 한장 한장 그려지며 멋지게 완성되는데... 철수, 스케치북을 빠르게 튕기듯 넘기면 에니매이션처럼 집이 완성되는 느낌이다... (철수의 작은 천재성이 엿보인다.)
다시 신경과 의사의 방/진료실 (교차편집):
이박사: ...사람들 마다 스트레스를 받아드릴 때 신체의 반응이 매우 다릅니다. 심한 스트레스였을 가능성이 높아요. 별일은 아닐 것 같지만...
쪽지에 뭔가를 적는 이박사. 수진, 무엇일까 궁금한 표정.
이박사: ...다음주에 MRI와 정밀검사를 해봐야겠어요.
다시 병원 복도 (교차편집):
수진이 진료실 문을 열고나온다. 철수, 스케치북을 덮으며 수진에게 다가간다.
수진: 많이 기다렸지?
철수: 어디 해부한 거 아냐?
철수, 수진의 옷깃을 들춘다.
수진: (웃으며) 스트레스로 인한 단순한 건망증 같대.
철수: 거 봐. 내 말이 맞지? 빨리 나가자, 난 병원냄새가 제일 싫어!
철수, 수진의 손을 붙잡고 병원 밖으로 서둘러 뛰어나간다. 웃으며 따라나가는 수진. 두 연인의 모습이 천진난만하다...
[INSERT: 철수의 집, '꿈의 궁전'] 지하 비밀의 방에 놓여있던 미니어처 건물들... 디졸브[DISSOLVE]로 하나 둘씩 사라지면서, 사각형 먼지 자국들이 보이고 차츰 보이고... 수진의 얼굴 표정, 좀 아쉽다... (저장되었던 기억들이 성공으로 다가오는 느낌.) 철수, 이제 혼자 제법 넥타이를 능숙하게 맨다. 그 모습을 보는 수진, 약간 섭섭하다...
72. 최철수 설계사무소 며칠 후
개업축하 화분들이 사무실 안으로 옮겨지는 동안... 온통 나무로 인테리어가 되어있는 설계사 사무실 내부가 소개되고... 진열장에는 미니어처 건물들이 일부 진열되어있고... 철수, 책을 잔뜩 들고 자기 방 안으로 들어가면, (전에 포장마차에서 보았던) 노가다1,2,3이 방안을 얼쩡거리는 것이 보인다. 방안의 진열품들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노가다3을 지나는 철수, 노가다3의 뒤통수를 툭 친다. 노가다3, 잽싸게 진열품을 내려놓는다.
노가다1: 앞으로 보기 힘들겠네, 십장?
철수: 십장, 아니래니까, 짜식이!
노가다1: 얘들아, 가자. 재미없다. 야 봤지? 변했어. 다 필요 없어.
노가다들 방밖으로 뚜벅뚜벅 걸어나가자,
철수: 짜식들, 어딜가? 얌마! 야! 어쭈!
철수는 웃으며 책상에 책을 놓고는 급히 따라나간다. 이때, 사무실 입구에 (이전에 잠깐 등장했던) 야리꾸리한 옷차림의 40대 후반의 여자(철수의 어머니/이하 오마담)가 등장한다. 환했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버리는 철수...
[CUT TO: 다시 철수의 사무실 방]
닫혀있는 방 문. 창가에 서서 팔짱을 끼고 창 밖을 내다보는 철수, 얼굴이 여전히 굳어있다. 오마담은 책장에 놓인 수진의 사진을 보고있다.
오마담: 색시 이쁜데? 거봐. 내가 진작 수염 깎으랬잖아. 사람이 달라 보인다.
오마담, 의자에 앉으며 담배를 요염하게 피운다. 철수, 몸을 돌려 창가에 기댄다. 여전히 팔짱을 낀 상태...
철수: (조용히) 안돼요.
오마담: 무슨 소리야? 누가 공짜로 달래? 한 달만 쓰자는데, 7부 쳐줄게. 아니 8부. 8부면 되지?
철수: 좀 세련돼 지셨네... 옛날엔 거의 강제로 뺏어가더니만, 이제는 '꿔달라고' 하시구. 타이밍도 기가 막혀... 노가다 생활 딱 종치자마자 나타나고 말이지. 나한테 뭐 돈 맡겨 놨어요, 오마담?
오마담: 야, 사람도 죽고 사는데 그깟 돈 몇 푼 가지고 증말 드럽고 치사하다.
철수: (웃으며) 드럽고 치사하다구? 오마담, 뭣 좀 물어봅시다. 어떻게 그렇게 돈 냄새를 잘 맡으시는지. 아주 통장 잔고까지 정확해요. 도대체 어떤 새끼가 찔러주는 거야? 엉?
오마담: (담배를 뻐금뻐금 피우며) 그래서, 어쩌겠다는 거니?
철수: 남자들 많잖아요? 껄떡쇠들한테 가보시지.
오마담: 껄떡쇠? 너 참, 엄마한테 어쩌면 말투가 그러니? 어떻게 넌 결혼하더니 더 못돼졌구나. 내가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자구 그 돈 끌어 쓴 줄 아니?
철수: 그럼 아니었어요? 사채꾼들 돈 갖고 자꾸 장난치다가 못 갚으면 어떻게 되는지 아세요? 깜방가요. 그 것도 사기죄로.
오마담: (일어나면서) 됐어. 엄마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 이거지? 그냥 콱 생명보험이나 들고 죽어줄게. 됐지? 야, 되게 미안하다. 돈도 없는 주제에 오래 살아서. 그래, 알았다. 이 에미 죽거든 보험금 타서 부잣집 색시하고 잘 처먹고 잘 살아라.
몹시 화가 나있는 철수, 말이 없다. 잠시 조용해지는 방안.
오마담: (다시 자리에 앉으며) 그럼 반이라도 안 될까?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너 요즘 7부 주는 데 많지 않다.
철수, 말없이 고개를 젓는다.
오마담: 저것도 자식이라고. 알았다. 내가 널 다시 찾아오면 성을 간다. 신문 열심히 봐라. 한강에 시체 뜨면 엄만줄 알아라. 뼈는 잘 갈아서 뿌려라. 어디 갖다 묻지도 마라. 성묘도 안 할 놈이... 돈밖에 모르는 야박한 자식...
오마담, 문을 '꽈당' 닫고 사라진다. 다시 조용해지는 방안.
철수의 사무실 밖, 거리 계속
오마담, 화난 얼굴로 사무소 빌딩을 나설 때, 길가에 수진이 나타난다. 수진은 손에 작은 선인장화분을 들고있다. 수진, 빌딩 입구로 향하는데 오마담을 지나친다. 서로를 쳐다보는 두 여자. 오마담은 누군지 알아차리지만 그냥 지나친다... 수진도 언뜻 기억이 나지만... 누군지 잘 모르겠다...
다시 철수의 사무실 방 - 계속
계속 창가에 기댄 자세로 움직이지 않는 철수. 멍했던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한다. 분노가 치밀면서 '씩씩' 숨이 고르지 못해진다. 철수, 진정하려고 커피 잔을 든다. 손이 부르르 떨린다...
이때, 문이 다시 열린다. 철수, 일그러진 얼굴로 문쪽을 올려본다. 문가에 수진이 선인장화분을 들고 서있다. 철수, 얼굴을 억지로 피며 수진을 바라본다. 수진, 뭔지 모르지만 이상한 느낌을 받는다.
73. 철수의 집 밤
소파에 엉켜 앉아 TV의 코미디 프로를 보고있는 철수와 수진. '깔깔깔...' 수진, 환하게 웃고있다. 수진의 웃는 모습을 바라보는 철수, 커피를 마시고 있다. 커피 잔에 가려진 철수의 표정, 몹시 경직되어있다. 수진의 웃는 모습이 철수에게 너무나 불편하게 느껴진다.
철수: (커피를 홀짝이며) 그렇게 재밌어?
철수의 가라앉은 말투에 놀라는 수진, 얼굴이 금새 굳는다. 뭔가 직감한 수진, TV를 끄고는 철수를 바라본다. 두 사람 말없이 서로를 쳐다본다. 갑자기 싸늘하게 흐르는 적막 속에서, '찰칵찰칵...' 벽시계 소리가 크게 들려온다. 긴장감이 도는 집안...
철수: 모래성 알지? (손으로 제스처하며) 바닷가에 모래로 쌓아 올리는 성... 열심히 정성 들여 이렇게 이렇게 쌓아 올려도 바닷물이 지나가버리면 한 순간에 무너져 버리는 게 모래성이잖아.
수진: (조용히) 무슨 말이야?
철수: 그게 행복 아닐까?
수진, 조용히 철수를 껴안으며 머리를 쓰다듬는데, 이마에 땀이 흥건히 고여있다. 약간 놀라는 수진, 말없이 철수의 이마를 닦아준다.
철수: (나지막이) 불안해. 다 불안해. 내일 아침 눈떴는데 이게 다 꿈이었다면? 난 어떡하지?
수진, 철수의 머리를 자기의 품 안으로 감싸 안으며 속삭인다.
수진: 사랑해, 자기.
철수: 이렇게 빨리 변해버린 나의 모습... 믿어지지 않아. 어색해... 불안해...
수진, 한참 말없이 철수의 머리를 위로하듯 쓰다듬는다.
수진: (귓속말로) 불안해 하지마. 이건 꿈이 아니야. 난 영원히 자기 사랑할거야. 내일도 모레도 변치않을 거야... 절대로 버리지 않을 테니까...
수진을 강하게 껴안는 철수, 얼굴이 수진의 가슴에 파묻혀 보이지않는다. 철수의 모습, 좀 처절하다... 수진, 철수의 머리를 계속 쓰다듬는다. (수진의 모습, 성모마리아가 연상이 된다.)
74. 이박사 진료실 계속
책상을 사이에 두고 다시 마주보고 앉은 이박사와 수진. 이박사, 또다시 녹음기를 켜놓는다. 곧 그의 질문이 시작된다.
이박사: (노트에 적으며) 오늘이 며칠이더라? 오늘이 며칠이죠?
수진: (곰곰이 생각하다가/웃으며) 제가 원래 날짜를 잘 모르고 살아요.
이박사, 책상달력을 보며 날짜를 옮겨 적는다.
이박사: 일주일 후에 오랬더니 보름 후에 오시면 어쩌자는 거죠? (수진, 우물쭈물 대답이 없자) 형제가 어떻게 되셨더라?
수진: 여동생 한 명 있어요.
이박사: 동생이 몇 살이죠?
수진: 스무 살. 아니 열 아홉이었나? (웃으며) 제가 수학에 좀 약해요.
이박사: 동생 생년월일 좀 말씀해보세요.
수진, 갑자기 허공을 바라보며 말이 없다...
75. MRI(자기공명영상) 촬영실 (교차편집)
새하얀 환자 가운을 입은 수진, MRI실 한가운데에 위치한 딱딱한 침대 위에 눈을 뜨고 누워있다. 조금 불안해 보인다.
MRI 촬영기사: 자 움직이지 마세요.
눈을 감는 수진, 침대가 첨단 기계들이 부착된 '굴' 안으로 들어간다.
다시 이박사 진료실 (교차편집):
계속 이어지는 이박사의 질문들... 노트에 체크하며 다음 질문으로 넘어간다.
이박사: 거리의 신호등이 무슨 색깔일 때 길을 건너갑니까?
수진: 박사님, 무슨 질문들이 이래요?
이박사: 아무 말 말고, 그냥 질문에 대답만 하세요.
수진: (웃으며) 질문이 뭐였더라?
이박사: 거리의 신호등이... 무슨 색깔일 때... 길을 건너죠?
수진: 그야, 파란색이죠. 아니! 빨간색! 박사님. 제가 좀 긴장이 돼서 생각을 잘 못하겠어요.
이박사: 본인의 생년월일?
이박사의 질문들이 계속 이어져나간다.
[DISSOLVE TO:]
이박사: ...어머니의 언니를 뭐라고 부릅니까?...
수진: ...이모... 큰 이모...
[DISSOLVE TO:]
다시 MRI(자기공명영상) 촬영실 (교차편집):
첨단 기계들이 작동하며, 수진의 머리가 '스캐닝'되고있다. 차갑게 보이는 기계들의 움직임과 수진의 얼굴과 머리가 계속 교차되어 보여지며 이박사의 질문들이 들려온다 촬영때 PET(양전자단층촬영)도 포함..
이박사: (목소리만/'ECHO'되며) ...18에19를 더하면 얼마입니까?... 태양은 어느 쪽에서 떠서 어느쪽으로 집니까?... 서쪽에서 바람이 불 때 풍선을 띄우면 어느쪽으로 날아갑니까?... '어부들이 힘을 다해 그물을 잡아 당깁니다' 이제 본인이 다시 말해보세요...
[이때 멀리서 영화의 러브테마가 들려온다...]
76. 조계종 총본산 빈터 이장면은 드림시퀀스가 아님! 오후
여러 중들과 조계종 관계자들, 김사장, 사수, 박전무, 영화에 나왔던 모든 노가다들, 레미콘 회사 사장과 운전수들... 모두가 모인 가운데 빈터 한가운데 서있는 철수가 보인다. 근처에 수진이 뿌듯한 표정으로 철수를 바라보고 있다... 노가다1이 철수에게 흐뭇한 미소를 날리며 큰 해머와 말뚝을 건넨다.
[SLOW-MOTION:] 빈터 한가운데에 박히는 말뚝의 클로즈업... 해머로 말뚝을 내리찍는 철수의 모습... 뒤에서 모두 밝은 표정으로 박수 친다.
[DISSOLVE TO:]
[SLOW-MOTION] 바람에 휘날리는 수진의 머리카락의 클로즈업... 철수와 수진, 그들의 새로운 자동차 중고 '사브' 오픈카 또는 오프로드 스타일의 중고 짚 랭글러를 타고 직선으로 뻗은 고속도로를 달린다. 낭만적이다. 둘은 마냥 행복해 보인다...
[DISSOLVE TO:]
77. 수진의 회사 아침
복사기 앞에 서있는 수진, 잔뜩 쌓인 서류들을 하나씩 복사하고 있다. 그녀의 모습 조금 초라하지만 미소를 잃지않고 열심히 귀엽게 일하고 있다. 지나가던 직원들도 수진을 불쌍하게 본다. 서류 복사 중... 서류뭉치 속에서 뭔가가 흘러나온다. 철수 엄마의 크리스마스 카드다! 그 밑에는 오마담 서류도 있고... 오마담의 사진도 있다. 그것들을 손에 쥐고, 자신에게 한심하다는 듯 아주 답답한 표정을 짓는 수진... 이마를 만지며 말없이 한탄하는데, 이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백화점 관계자1이 비서와 함께 나타난다. 순간, 수진은 코너로 숨는다.
철딱서니 없어 보이는 젊은 여직원이 두 손님을 용준의 방으로 안내한다.
백화점 관계자1: 김수진 팀장님은요?
여직원: (나지막이) 저기 구석에 숨어있어요. 대기발령이에요!
백화점 관계자1: 디자이너, 안나 정씨는요?
여직원: (귓속말로) 부서 옮겼어요! 나중에 자세히 얘기해드릴게요...
놀라움에 고개를 젓는 백화점 관계자1... 수진은 코너에 계속 숨어있고. 표정도 굳어있다. 들고 있던 오마담의 서류를 다시 보는데, 깊은 생각에 빠지며 그녀의 표정은 다시 예전처럼 '탐정틱'해진다...
78. 다시 오마담의 동네 해질 무렵
예전에 수진이 잠깐 왔었던 '선수'촌 골목. 그러나 그녀는 전혀 생소한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손에는 오마담 서류가 쥐어져 있다. 결국 허름한 2층집 앞에 서게 되는데...
[CUT TO: 오마담 집 안]
집안엔 온통 차압딱지만 붙어있다. 놀라는 수진... 집안을 '탐정틱'하게 두리번거리는데, 갑자기 구석에서 누가 나온다.
수진: (깜짝 놀라며) 아악!
구청직원: (손에 차압딱지와 문서를 들고 있다) 누구세요?
수진, 다시 또 우물쭈물...
79. 철수의 집 밤
철수는 머리를 수진의 허벅지에 베고 누워있다. 철수는 스케치북에 새로운 집을 그리고 있다. 한편 수진은 자신의 'Day Planner'수첩에 뭔가를 작게 그리고 있다. 자세히 보면 철수의 얼굴이다. 제법 잘 그렸다. 수진, 그림을 그리다 말고, 종이를 넘긴다. 몇 장 넘기면, 하루 일정들이 아주 자세히 적혀있다. 수진은 최근 자기 일과들을 자세히 기록해 놓은 것 같다...
펜으로 줄을 그어가며 다음날 일정들을 자세히 검토하는 수진. 종이를 앞으로 넘겼다 뒤로 넘겼다 하며, 확인하고 또 확인한다. 그러다, 여러 장 더 넘기면 수진이 그린 그림이 또 나온다. 다시 철수의 얼굴이다. 한 장 또 넘기면. 다시 철수의 얼굴이다... 미소 짓는 수진, 그러나 순간 뭔가 알 수 없는 근심에 사로잡힌다. 수진, 애써 밝은 표정을 지으며, 철수의 스케치를 보며 말한다.
수진: 뭐야? 새로운 프로젝트?
철수: 아니, 우리 집. 좀만 기다려, 알았지? 땅도 봐뒀어.
수진: 시간은 넉넉해. 이 집도 좋은데 뭘... 와, 이 손 봐! 이제 티눈이 안 생기네?
철수: 망치를 안 만지니까. (손을 보며) 기집애 손 같네.
이때, 갑자기 수진의 수첩에서 오마담의 사진이 흘러나온다. 놀라서 눈이 휘둥그래지는 수진. 순식간에 표정이 굳어버리는 철수...
[CUT TO:]
철수, 식탁의자에 걸터앉아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다. 수진, 차를 마시며 등을 돌리고 앉아있는 철수의 뒷모습만 바라보고 있다. 식탁 위에는 오마담의 크리스마스 카드, 은행서류, 차압서류, 그리고 그녀의 사진이 가지런히 놓아져 있다. 한참 적막이 흐르다가...
철수: 난 엄마 없어.
수진: (조심조심) 그래도 어머니신데...
철수: 난 엄마가 없어.
수진: (조심조심) 아무리 그래도... 어머니신데...
철수, 담배를 집으려는데, 주체할 수 없는 분노로 손이 부르르 떨린다.
철수: (경직된 목소리로) 그 돈이 어떻게 모은 돈인 줄 알아? 아홉 살 때부터 이 악물고 모은 돈이야. 그런 돈을 잘 알지도 못하는, 그것도 사채놀이 하다가 돈 날린 술집마담한테 바치라고? 절대 안돼.
수진: 그래도, 가족이잖아...
철수: 가족? 내 가족은 여'끍■. 이게 내 집이고, 니가 내 가족이야! 됐지?
철수, 테이블 위의 오마담의 물건들을 집어 느리게 찢기 시작한다. 보란 듯이... 충격에 수진은 또 다시 눈물을 글썽인다.
수진: (조용하게) 자긴 내가 울 때 마다 나한테 '부모를 잃었어? 나라를 잃었어?' 그러지? 지금 부모를 잃는 순간 아니야?
철수: 에이 씨!
철수, 테이블의 유리컵을 수직으로 잡아 내리친다. 유리컵이 '와작!'깨지며 산산조각이 나며, 철수의 손바닥에 피가 고인다. 놀라는 수진, 자리에서 일어나는 철수에게:
수진: 용서가 뭐 그렇게 힘들어!
철수: 그만 해!
철수, 분노가 폭발하며 식탁의자를 번쩍 들어 내리치며 마구 깨부순다. 그의 짐승 같은 모습, 끔찍하다. 수진, 겁먹은 아이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벽에 붙어 선다.
철수: (고함치며) 내가 어떻게 모은 돈인 줄 알아! (의자를 바닥에 연거푸 내리찍으며) 낳아주면 다야! 낳아주면 그게 부모냐구! 니가 그 여자 알아? 왜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도와줄려그래! 엉! (주먹으로 벽을 치며) 울지마! 그만 울어!
수진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린다.
철수: 그만 울어! 내가 왜 안 우는지 알려줄까? 그날 다 울었어! 그 여자가 날 그 할아범한테 맡기던 날, 밤새 목 터져라 울었다구!
수진, 울음이 터져 나오자 손으로 입을 틀어막는다. 철수, 그녀의 모습을 외면하듯이 등을 돌린다. 그리고, 씩씩거리며 벽을 보고 선다.
철수: (지친 목소리로) 난 이제 더 이상 그 여자 때문에 울 일도 없고. 단 10원 한 푼도 줄 수 없어.
잠시 집안이 조용해진다. 씩씩거리는 철수의 숨소리뿐...
수진: (울먹이며) 용서는 힘든 게 아냐. 용서란 말야, 마음속에 방 한칸만 내주면 되는 거야. 무슨 말인지 알아? 이건 우리 할아버지가 자주 해준 얘기야. 진짜 목수는 있잖아, 자기 마음의 집을 잘 짓는 사람이래. 난 잘 알아. 자기도 여태껏 그 집을 정성 들여 차근차근 지어왔던걸... 근데 자기는 그 소중한 마음의 집을 자기가 그렇게 미워하는 엄마한테 안방, 부엌방, 화장실, 창고... 다 내주고, 정작 자신은 집 밖에서 덜덜 떨고 있잖아? 생각해 봐. 자기 마음속에는 정작 누가 사는 거야?
수진, 목이 메이지만, 침을 삼키며 계속 말을 이어간다. 철수, 여전히 헐떡이며 벽을 보고 서있다. 그의 손바닥에는 피가 주르륵 흐르고 있다...
수진: (계속/나지막이) 용서는 쉬워. 방 한 칸만 내주면 돼. (떨리는 목소리로) 이 말씀을 우리 아빠는 세월이 흘렀어도 잊지 않으시고... 유부남과 도망칠뻔한 이 창피한 딸을 용서하셨고, 우리 결혼도 그렇게 쉽게 허락하셨던 거야... 왠지 알아? 왠지 아냐구! (울먹이며) 용서란 미움에게 방 한 칸만 내주면 되는 거니까!
수진, 흐느끼며 방 쪽으로 뛰어간다. 계속 벽만 보던 철수, 고개를 돌려 수진의 뒷모습을 본다. 수진, 방안으로 들어가며 문을 걸어 잠근다. 철수, 고민에 빠진다...
[CUT TO: 잠시 후]
수진, 방 문을 천천히 여는데, 철수가 보이지 않는다. 조용히 마루로 나가본다. 철수가 없다. 화장실 문도 열어보는데, 거기도 철수가 없다. 마루 한가운데 서는 수진, 가만히 서서 깨진 유리와 부서진 식탁의자를 본다.
80. 경찰서 유치장 밤
유치장 면회실에 앉아있는 철수, 유리창 건너편에 앉은 오마담의 말을 묵묵히 듣고만 있다. 철수의 손에는 피 묻은 작은 부엌수건이 쥐어져 있다. 머리가 헝클어져있는 오마담의 얼굴은 구타 당했는지 여기저기 부어있다.
오마담: (몹시 화난 듯) 됐어. 누가 너한테 도와달래? 난 여기서 이렇게 살다 죽을래. 왜? 나 뒈졌나 보러왔냐? 그래, 조금만 기다려라. 안 보채도 곧 죽는다. 죽으면 되잖아? 죽는다구!
오마담, 옆에 있는 벽에 머리를 박치기한다. 괴로운 표정으로 여러 번... 철수, 감정을 쇠진한 듯 표정이 전혀 변하지 않는다. 그냥 오마담의 말을 멍하니 듣고만 있다.
오마담: (지친 듯) 철수야. 나 무섭다. 나, 감방은 처음이다. 너무 춥고, (뒤쪽을 몰래 가리키며) 여기 완전 미친년들 천지야. 이제 늙으니까 도와주는 새끼들도 없고. 나라고 뭐 자식한테 신세지고 싶겠냐? 돈은 안 갚아줘도 된다. 나 감방에서만 빼주라. 니가 그렇게 싫어하는 이 '오마담'의 마지막 부탁이야. 나 여기만 나가면 너 하라는 대로 다 할게. 나 머리 깎고 중 될까? 어디 애 봐주는 식모라도 할까? 나 여기서만 빼주라, 철수야. 응? 너 어렸을 때 얼마나 착했다구. 엄마 좀 도와주라. 응?...
철수, 포기한 듯한 표정. 오마담의 말을 묵묵히 계속 듣기만 하는데...
81. 경찰서 앞 주차장 계속
경찰서 앞 주차장에서 마주보고 서있는 철수와 젊은 사채업자. 사채업자는 들고 있는 계산기를 열나게 두드리며, 작은 노트에 숫자를 적어나간다.
사채업자: ...그러니까, 선 이자를 먼저 빼고... 지난 한달 이자가 8부니까... 그거 곱하기 이거... 그리고... 못 갚은 날부터 하루 이자가 7부씩 붙으니까... 그게 며칠이냐? 그걸 합해서... (어쩌구 저쩌구...)
철수, 앞이 캄캄해 진다. 숨을 멈추며 눈을 지긋이 감는다. 철수의 눈앞에 예전에 혼자 서있던 숲 속의 아름답고 푸른 언덕이 어른거린다... 폭풍처럼 몰려오는 현기증에 이마를 주무르며 한숨을 길게 쉰다.
[INSERT:] 화면을 가득 채우며 켜지는 성냥불...
82. (예전의 그) 포장마차 밤
수진, 들고 있던 성냥불을 철수의 담배에 갖다 댄다. 담배를 한 모금 깊이 내쉬는 철수. 둘은 옛날 그 자리에 앉아있다. (철수의 손에는 붕대가 감겨있다.)
철수: (나지막이) 우린 이제 그지야.
수진: (목소리 잠겨있지만) 그래? 내가 낼게.
철수, 피식 웃는다.
수진: 진작 낸대니까?
수진, 핸드백에서 포커카드 세장을 꺼낸다. 벙찐 표정의 철수, 웃음을 참지 못한다. 수진, 곧장 카드 세장을 나란히 테이블 위에 놓으며 말한다.
수진: 아줌마, 얼마에요?
수진, 카드를 섞기 시작한다.
수진: (철수에게 귓속말로) 자, 돈 놓고 돈 먹기! 지나가는 개도 다 맞추는 바로 그 게임!
귀가 간지러워 지는 철수, 수진의 어깨를 부둥켜 안으며 환하게 웃는다. 철수의 환한 모습 이순간 가장 강렬하다. [이때, 카메라, 예전의 카메라 움직임과 동일 기시감 (d j vu) 창조.하게 빠지며] 둘은 뜨거운 키스를 한다...
[DISSOLVE TO:]
83. 이박사 진료실 오후
창밖에 아름다운 꽃들이 보이고... 따스한 햇살이 창문 안으로 들어오는 이박사의 진료실... 수진과 이박사, 다시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다. 이박사, 우물쭈물 말이 없다. 수진, 이박사를 쳐다보다 웃으며 말한다.
수진: (웃으며) 말씀을 좀 하세요! 네?
이박사: MRI 사진과 양전자단층촬영자료를 분석한 결과... 김수진씨의 뇌에는... (헛기침을 하며) 김수진씨의 머리 속에는 이상단백질이 혈관에 축적되고 있는데... 이것이 뇌세포를 느리게 괴사시키고 있는 것이... 그러니까, 유전자 이상으로 인한 것이 의심되고 있는 것이... 음... 그러니까...
수진: 박사님,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전혀 이해가 안가요. 좀 쉬운 말로 설명해 주세요.
이박사: 아마도 유전적인 요인이 크게 작용한 굉장히 드문 케이스 같은데... (MRI 사진을 가리키며) 이걸 보시다시피... 뇌가 벌써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수축... 에햄! 위축되고 있어서, 처음엔 광우병인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게 아니고...
수진, 긴장한 표정으로 이박사를 바라본다. 이박사,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박사: 수진씨는 알츠하이머 병에 걸렸어요.
수진: 예?
수진, 황당해 하며 웃는다.
이박사: 지난 달에 답하신 질문들, 치매 판별 질문들이었습니다.
수진: (웃으며) 농담이시죠?
의사: 유감이지만 아닙니다.
84. 분주한 거리 해질 무렵 (교차편집)
행인들이 많은 분주한 거리를 걷고 있는 수진, 조금 멍해 보인다. 이박사의 말을 생각하고 있는 듯...
다시 이박사 진료실 (교차편집):
수진: 저 이제 스물 일곱이에요... 어떻게 치매에 걸릴 수가 있어요?
이박사: 걸릴 수 있어요. 유감이지만...
수진: (고개를 저으며) 말도 안돼요! 믿을 수가 없어요!
이박사: 슬픈 일이지만... 육체적 죽음보다 정신적 죽음이 먼저 올 겁니다. 서둘러 준비를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수진, 가만히 이박사를 쳐다본다.
이박사: 가족이 누군지, 친구가 누군지, 자기가 누군지... 모든 기억들이 서서히 지워질 거에요.
다시 분주한 거리 (교차편집):
분주한 거리를 멍하니 걷던 수진, 갑자기 울음을 터트린다...
다시 이박사 진료실 (교차편집):
이박사: 약을 먹으면 진행을 조금 늦출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 뿐이에요.
수진: (눈물이 글썽) 그럼 전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죠?
이박사: 회사 다니시죠?
수진: 예. 그런데요?
이박사: 하루빨리 그만두십쇼. 조금만 지나면 컴퓨터도 못쓰고, 전화도 못 받게 될 거에요. 그 후엔 물건정리도 못하게 되고, 그러다가 마지막에는 아무것도 못하게 됩니다.
다시 분주한 거리 (교차편집):
다시 분주한 거리... 수진은 눈물을 닦으며 계속 걷는다. 어디로 가는 지도 모른다. 계속 흐느끼는 수진, 어디론 가 도망가듯 뛰기 시작한다...
다시 이박사 진료실 (교차편집):
수진: 저에게 남은 기간은 어느 정도인가요?
이박사: 환자마다 다르지만 초기 증상이 나타나면 5년에서 7년 정도까집니다.
수진: 5년이요? 그렇게 빨리요?
이박사: 수진씨는 좀더 빠를 겁니다. 진행이 벌써 너무 많이 되어있기 때문에...
다시 분주한 거리의 골목 구석 해질 무렵 (교차편집):
손에 얼굴을 파묻은 수진, 소리없이 문 앞에 기대어 서 있다.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린다...
다시 이박사 진료실 (교차편집):
이박사: 물론 '알츠하이머'란 병은 의학적으로 봤을 때, 의심하는 수준에서 끝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죽기 전에 정확한 진단이 나오기 어렵단 말씀입니다. 그래서 임상적으로는 병력이나 가족적, 신경학적 검사와 MRI나 PET을 통해 진단을 하죠. 이러한 방법이 확증이라 할 수는 없어도 진단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이 병의 특성상, 죽어서 뇌를 뜯어보기 전까지는 정확한 진단이 나오기 어려워요.
수진: (흐느끼며) 그래서 어쩌란 말이에요! 희망을 주시는 건 가요? 절망을 주시는 건가요?
수진, 눈물을 흘리며 신경질적으로 진료실을 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
85. 철수의 집 밤
철수의 집의 현관문이 열린다. 철수가 흐뭇한 표정을 하며 들어온다. 오늘도 여지없이 싱싱한 과일을 손에 들고 있다. 앞치마를 두르고 부엌일을 하고 있던 수진, 고개를 돌려 철수를 본다. 그녀는 의외로 환한 미소를 짓고 있다.
[CUT TO:]
'왱왱...' 먼지가 가득 매워진 철수의 작업 창고.... 먼지투성이가 되어있는 철수, 땀을 흘리며 뭔가를 뚝딱뚝딱 만들고 있다. 그들이 살 집의 모형이다... 문 가에서 푸짐한 과일접시를 들고 있는 수진, 그의 진지한 모습을 가만히 바라만 본다... 그가 사랑스럽다...
[CUT TO:]
먹다가 반쯤 남은 과일이 접시에 보이고... 접시는 뚜껑 닫힌 변기 위에 놓여져 있고... 변기 옆에는 공구가방이 보이고... 철수가 사과를 입에 물고 화장실 바닥에 누워 렌치로 변기 밑을 고치고있다. 수진은 철수의 일하는 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본다.
철수: (사과를 입에 물고, 혼잣말로) 데기랄, 어껑 셱~! 누가 이걸 돌려 놨어? 엉! 누구야, 누구... (노가다 스타일로 궁시렁 궁시렁...)
[CUT TO:]
'쾅쾅' 벽에 망치질하는 철수... 수진이 과일접시를 들고 옆에서 지켜본다. (과일, 이제 몇 개 남지 않았다.) 두 사람의 사진이 담긴 액자를 벽에 거는 철수, 망치를 허리에 차고있던 공구벨트에 걸치며 말한다.
철수: 됐어?
수진, 손에 들고있던 쇠못 한 개를 들어보이며 귀여운 표정을 짓는다.
철수: (짜증나지만, 웃으며) 아, 또 뭐야! 오늘 자꾸 왜 이래! 아, 피곤해 죽겠는데! 불만이 뭐야, 도대체? 말로 하자구, 엉?
수진, 웃는다.
[CUT TO:]
깨끗이 씻고 난 철수... 그와 수진은 소파에 달라붙어 누워있다. 옆에 놓인 과일 접시는 완전히 비어있고... 철수의 넓은 어깨에 머리를 기댄 수진, 철수의 손을 만지며 말한다.
수진: 나 회사 그만둘까?
철수: 왜?
수진: 그냥.
철수: 전업주부 되고싶어?
수진: (잠시 생각하다) 응. 밥하구 빨래하구, 나 그러구 살면 안될까?
철수: 왜 안돼? 나야 좋지. 근데 왜 갑자기?
수진: 몰라. 그냥...
철수: 거봐. 힘들지? 내가 벌어오면 되는데 뭣하러 힘들게 전쟁터로 맨 날 나가? 그래, 당장 쉬어.
수진: 나 내일부터 나가지 말까?
철수: (수상한 표정) 가만있어봐? 무슨 일 있지? 혹시 누구 또 때렸어?
철수, 계속 말하려는데, 그의 입을 가로막듯 웃으며 키스하는 수진.
수진: 우리 애기 가질까? (철수, 답이 없자) 그러면, 내 꿈은 완전히 이루어 질 텐데. 어때?
철수: (표정이 어두워지며) 애기? 잘 모르겠는데? 한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수진, 시무룩한 표정으로 철수를 바라보다가:
수진: 그거 해줘.
철수: 뭐?
수진: 그거.
철수: 뭐?
수진: 그... 야... (한숨 쉬며) 야...
철수: 야~? 야...한 거? 이거? (손으로 야한 동작)
수진: 아니~! 그거.
철수: 야... 야구?
수진: 아니! 그거 있잖아. 그거... 카드3장...
철수: 야바위?
수진: 응!
철수: 왜? 맞추지도 못하면서.
수진: 그냥. 한번만.
철수: 싫어. 귀찮어. 피곤해.
수진: 에이... 딱 한번만!
철수, 소파에서 일어나, 일그러진 얼굴로 카드3장을 커피테이블 위에 놓는다. 그리고, 말없이 카드를 뒤섞는다. 좀 무성의하다.
수진: 말은 안 해?
철수, 하기 싫다는 표정으로 수진을 바라본다. 수진, 애원하듯 철수를 바라본다. 철수, 마음을 바꾼 듯 카드를 빠르게 섞기 시작한다.
철수: (약장수 말투로) 자! 돈 놓고 돈 먹기! 지나가는 애도 다 맞추는 바로 그 게임!
수진, 흐뭇하게 웃기 시작한다.
철수: (아주 빠르게) 자! 수진이는 반찬값! 철수는 담뱃값! 개들은 사료값~~! 1000원이요. 1000원! 돈 놓고 돈 먹기!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게 아닙니다. 자... 왕을 찍으세요, 왕!...
철수가 야바위를 하는 동안... 수진은 웃으며 눈물을 흘리기 시작한다. 놀라는 철수, 동작을 멈춘다.
철수: 왜 그래?
수진: (미소 지으며) 화장실 좀...
수진, 울음을 꾹 참으며 화장실로 간다. 철수, 수진의 뒷모습을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철수, 3장 다 뒤집으면 모두 왕(KING)이다.
[한편, 화장실 안:] 벽 구석에 얼굴을 파묻고 소리 없이 흐느끼는 수진이 보인다...
86. 철수의 집 아침
[INSERT:] 평화로운 동네 골목의 이른 아침. 거리엔 청소부들이 청소를 하고, 조깅하는 노인도 보이고... 미소 지으며 슈퍼를 나서는 수진이 보인다. 두 손에 든 비닐가방엔 음식 재료들로 가득하다...
집안으로 들어오는 수진, 철수의 구두를 예쁘게 정성 들여 가지런히 놓는다... 그런데 구두는 거꾸로 놓여있다. 곧 이어, '톡톡톡톡...' 귀여운 도마소리가 집안에 울려 퍼지고... 철수는 도마소리에 눈을 뜬다. 부엌에선 수진이 열심히 요리를 하고있다. 철수의 도시락을 준비하는 모양.
[CUT TO:]
수진, 철수의 넥타이를 메어준다. 미소가 끊이지 않는 수진, 도시락가방을 철수에게 건넨다. 철수, 도시락가방을 올렸다 내렸다 하며 무게를 느껴본다.
철수: 고마워. 나 새벽부터 부스럭대는 소리 다 들었어. 자그마치 한시간 43분이 걸리더구만?
수진: (웃으며) 내일은 기록 경신해야지?
철수, 현관문 앞에서 구두가 거꾸로 놓인 것을 발견한다. 그냥 웃어넘긴다. 집 밖으로 나가 철수를 배웅하는 수진. 철수는 발길을 힘차게 옮겨 거리로 나선다.
[CUT TO: 집 안]
문닫고 집안으로 들어오는 수진, 서서히 어둡고 슬픈 표정으로 변한다... 이때 갑자기 집 전화가 울린다. 누굴까? 수진, 잠시 고민하다가 수화기를 천천히 든다.
수진: 여보세요?
용준: (목소리만) 나 용준이야. 갑자기 그렇게 그만두면 어떻게? 너 일도 잘 해결됐는데!
수진, 대답이 없다.
용준: 여보세요? 여보세요!
수진: 예. 듣고있어요.
용준: 빨리 출근해! 다들 나 때문에 니가 그만뒀는지 알잖아!
수진: 그게 아니라고 해명해 드릴께요. 전 이제 그냥 집에서 살림하면서 살고싶어요.
용준: 만나자.
수진: 안돼요.
용준: 찝쩍대려고 만나자는 게 아냐! 사퇴를 해도 다 절차가 있는 거야! 바보같이 왜 그래? 단둘이 만나는 게 싫으면, 직원들 데리고 나갈게.
수진: 그럴 필요는 없어요.
용준: 좋아. 그럼. 어디서 만날까? 집 어딘지 아는데... 데리러 갈까?
수진: 아뇨. 회사로 갈게요...
87. 조계종 총본산 공사터 점심시간
거대한 건설 장비와 차량들이 공사터로 모여있다. 노과장과 조계종 관계자들, 멀리에서 철수의 모습과 공사장의 풍경을 보고 있다.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리는 노가다, 신나게 소리치며 달려가는 노가다, 밝은 모습으로 손을 흔들며 빠져 나오는 레미콘 기사. 현장의 분위기가 엄청나게 밝고 명랑하고 활기차다.
기초공사가 한창인 공사터로 걸어가는 노과장과 일행들, 철수에게 다가간다.
철수: 안 나오셔도 되는데요.
노과장: (웃으며) 현장 분위기 아주 좋은데요... 우리가 오는 거 미리 알고 다 짜고 하는 거 아니죠?
철수, 머리를 긁으며 웃는다.
[CUT TO:]
철수, 현장을 둘러보다가 손목시계를 한번 본다. 시계바늘이 11:55을 가리킨다.
철수: (큰소리로) 자 점심들 먹읍시다!
[CUT TO:]
간이 테이블에 모여 앉아 식사준비를 하는 공사장 인부들, 관계자들... 등등... 철수만 유일하게 도시락을 싸왔다. 환한 표정의 철수, 도시락가방을 연다. 수십 명의 남자들이 철수를 둘러싼다.
노가다1: (여전히 비아냥거리며) 봐. 남자는 장가를 잘 가야 돼. 봤지? 역시...
노가다2: 으아, 가방만 봐도 군침이 쫙!...
철수,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도시락을 가방에서 꺼낸다. 동일한 사이즈의 도시락 통이 두개가 나온다. (하나는 밥, 또 하나는 반찬인가?)
노가다1: 어이 소장님, 벌써부터 냄새가 죽이네!
철수, 웃으며, 첫 번째 도시락통의 뚜껑을 연다. 맛있게 생긴 하얀 밥이다. '우우...'하며 소리지르는 노가다들. 철수, 웃으며 하얀 밥의 냄새를 음미한다. 그러다 장난스럽게 굶주린 개처럼 침을 다신다.
노가다들: 하하하!
철수, 기대에 부푼 표정으로 두 번째 뚜껑을 느리게 연다. 노가다들, 모두 두 번째 도시락 통을 주시한다... 느리게 열리는 뚜껑. 철수, 갑자기 표정이 굳는다. 모두 표정이 굳어버린다. 두 번째 도시락도 하얀 밥이다...
88. 회사로 가는 길1 낮
거리를 걷고 있던 수진. 표정이 굳으며 걸음을 멈춘다. 수진의 시야가 좁아지기 시작한다 [POV SHOT]... 다시 혼란에 빠진 수진의 모습이 보여진다 [Zoom-in/Track-out으로 묘사]... 그리고, 소리가 또 '웅웅'거리기 시작한다...
수진, 현기증이 난 듯, 눈을 내리 깔고 천천히 걷기 시작한다. 수진의 거동이 약간 이상하지만, 거리의 행인 누구도 수진에게 눈길을 주지 않는다...
[DISSOLVE TO:]
89. 회사로 가는 길2 낮
더욱 붐비는 시내 거리... 수진은 패닉 상태에 빠져있다... 위를 올려보면, [좁은 시야로 보이는] 건물들이 뭐가 뭔지 모르겠고... 그녀의 앞에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뭐가 뭔지 모르겠고... 완전히 방향감각을 상실한 수진, 부르르 떨리는 손으로 핸드백을 연다. 가방 속에서 핸드폰을 겨우 꺼낸다. 핸드폰을 손에 쥔 수진, 얼굴이 새하얗게 된다. 핸드폰은 손에 쥐었지만, 폴더를 열지 못하고 겉모양만 살핀다. (전화 거는 방법을 잊어버린 듯.) 수진, 고통스러워 하며 길모퉁이로 헐떡이며 간다. 벽에 한쪽을 기대고 천천히 몸을 쭈그리는 수진... 그녀의 손에서 핸드폰이 떨어진다. 수진은 괴로워하며 흐느낀다... 몇몇 행인들 수진을 보지만, 그냥 바쁘게 지나친다.
이렇게 아무도 돕지 않고있을 때, 누군가가 갑자기 수진에게 뛰어온다.
경찰1: 괜찮으세요?
90. 이박사의 진료실 낮
눈을 감고 고개를 뒤로 제치는 철수... 갑자기 '꽝!' 주먹으로 테이블을 강하게 내리친다. 이박사 책상 앞에 서있다.
철수: 이봐 당신 미쳤어? 아니 그걸 다 말하면 어떻게? 말해서 어쩌자구!
이박사: 안 하면? 말을 해줘야 본인도 마음의 준비를 할 거 아니오?
철수: 확실하다고 장담해?~
이박사: (고개를 끄덕끄덕) ...
철수: 진짜 확실해?
이박사: 못 믿겠으면 딴 병원 가보시오!
이박사,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나가려는데 철수가 그의 멱살을 잡는다.
철수: (멱살을 끌어당기며) 확실해?! 대답해!~~
이박사: 이거 왜 이래! 진짜 미쳤군! 이거 놔!
순간, 간호사들이 진료실 안으로 뛰어 들어온다. 간호사들, 철수와 이박사를 힘겹게 갈라놓는다.
간호사1: (철수에게) 우리 박사님도 사모님을 이 병으로 잃으셨어요! 반평생 알츠하이머만 연구하신 분이세요!
숨을 몰아 쉬며 벽에 기대는 철수. 이박사를 노려본다. '콜~록 콜~록' 기침을 하는 이박사, 목을 만지며 자리에 다시 앉는다.
회사로 가는 길2 계속
경찰의 부축을 받으며 걸어가는 수진. 상태가 조금 나아진 것 같다. 현기증을 떨쳐버리고 싶지만, 여전히 몽롱한 표정...
경찰: 괜찮으세요? 병원으로 가시죠. 녜?
수진, 경찰에 기댄 상태에서 계속 걷는다. 워키토키에서 소음과 함께 사람소리가 난다.
경찰: (워키에 대고) 잠깐 기달려! (수진에게)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수진: (나지막이) 조... 조금만... 조금만... 더 걸어요...
경찰: 어디 가시는데요?
수진: (우물쭈물하다가) 모... 모르겠어요...
경찰: 네?
91. 종합병원 건물 밖 낮
온갖 치매 환자들이 모여있는 작은 공원. 철수와 이박사, 이제 진정을 한 듯, 함께 공원길을 걷고 있다.
철수: 믿을 수가 없어요. 요즘 인간도 복제한다는 세상에 그런 병 하나 못 고칩니까?
이박사: 글쎄. 십년이 될지 이십년이 될지 그건 누구도 장담 못하지. 유전자치료가 가능해지면 좋을 텐데...
철수: 그럼 우리 수진인 어떡해요?
이박사: 언제나 한발 늦지. 그게 인생이야. 아쉬움 없이 죽는 사람이어디 있나?
이박사의 냉소적인 대답에 다시 기분이 상하는 철수... 씁쓸히 목례하고는 이박사와 헤어진다. 둘은 인사말도 없다. 이박사, 멀어지는 철수의 뒷모습을 본다...
종합병원 근처 거리 계속
종합병원 근처 거리를 걸으며 핸드폰으로 전화를 거는 철수. 신호음이 들리고...
남자목소리: 여보세요?
철수: (놀라며) 누구세요?
남자목소리: 저요? 이 핸드폰 주운 사람인데요?
회사로 가는 길2 계속
여전히 경찰1의 부축을 받으며 걷고있는 수진. 약간 괜찮아 보이지만 불안하다. 수진, 갑자기 표정이 변하기 시작한다. 앞에서 걸어오는 누군가를 발견한 듯 반가움에 미소 짓는다. 걸어오던 사람은 서용준이다!
용준, 경찰과 함께 서있는 수진을 발견하는 순간, 빠르게 달려온다.
용준: (수진에게) 무슨 일이야? (경찰1에게) 무슨 일이죠?
경찰1: 그게 말씀입니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되나?...
용준에게 반가운 표정을 짓는 수진, 그의 두 손을 잡으며 속삭인다.
수진: 용준씨...
회사로 가는 길1 잠시 후 (오후)
수진이 전화기를 떨어뜨린 지점. 수진의 핸드폰을 철수에게 건네주는 회사원 옷차림의 남자.
회사원: 담배 피우러 나왔다가 여기서 주웠어요.
철수, 고개를 돌려 거리를 보면 엄청난 숫자의 행인들이 걸어 다닌다. 이 많은 사람들 속에서 어떻게 그녀를 찾을 것인가? 표정이 심각해지는 철수, 인파 속으로 천천히 걸어간다. [카메라, CRANE-UP...] 철수를 둘러싸며 떼거지로 몰려드는 퇴근길 인파...
회사원: (목소리만) 뭐 별 말씀을! 고맙단 말씀 안 하셔도 됩니다!
92. 기차역 근처의 거리1 오후
한편, 수진과 용준은 예전에 수진이 혼자 여행가방을 들고 걷던 거리를 걷고있다. 수진은 몹시 지친듯한 표정으로 용준의 팔짱을 끼고있다. 용준은 표정이 사뭇 밝다. 수진이 마음이 바뀐 것 일까?
용준: 우리 다시 옛날로 돌아갈 수 없을까? 2년 전으로?
수진: 2년전? 왜요? (잠시 생각을 해보며) 그땐 우리 만나기도 전이잖아요?
용준, 멍한 표정... 대답이 이해가 영 안 간다. 용준, 수진을 바라보는데, 수진, 표정이 이상해진다. 기억이 돌아왔는지, 팔짱을 살며시 풀며 한걸음 물러선다.
수진: 어디 가는 거죠, 우리?
용준: 기차역.
수진: Pourquoi?
용준: Pourquoi? 왜? 니가 데리고 왔잖아?
수진, 이상한 표정을 지으며 재빨리 차도 쪽으로 간다.
용준: (수진을 뒤따르며) 수진아. 어디 가서 얘기 좀 할까?
수진, 대답 없이 택시에게 손짓한다.
용준: 잠깐만 기다려!
수진, 서둘러 택시를 잡아탄다. 급히 출발하는 택시를 안타까운 표정으로 바라보는 용준...
[DISSOLVE TO:]
회사로 가는 길2 오후
시내거리에 군중 사이로 두리번거리며 헤쳐나가는 철수, 초조한 기색. 어느 여자의 어깨에 손을 얹는다. 여자, 고개를 돌리면 수진이 아니다. 이런 식으로 몇 번을 반복하는 철수... 점점 더 초조해진다...
93. 야구 연습장 초저녁
힘없이 골목길을 걷던 철수, 혹시나 하는 표정으로 코너를 돈다. 야구 연습장이 보인다. 그곳을 향해 걷기 시작한다. 예상대로 수진이 그곳에 있다. 철창 앞에 서있는 수진, 다른 남자들이 공을 치고있는 것을 구경하고 있다. 철수, 수진 옆에 선다. 수진, 타격을 계속 구경하며 말을 한다. [이하: 대사 사이 사이에 공치는 소리가 들린다.]
수진: (힘없이 미소 지으며) 이상하다. 공이 아홉개 밖에 안 나와. 원래 열 개지? 열 개가 나와야 되는 거지? 아저씨한테 얘기했는데, 원래 아홉 개라고 자꾸 우겨. 헷갈리게...
철수: (힘없이) 그래? 기계가 고장났나보지.
철수의 표정이 어둡다. 수진, 뭔가 직감한 듯 입을 연다.
수진: 얘기 들었어?
철수: 무슨 얘기?
수진: 내 머리 속에 지우개가 있다고...
철수는 대답을 못한다. 수진, 철수를 쳐다본다. 두 사람 다 감정을 쇠진한 듯, 표정이 멍하다.
수진: (나지막이) 우리 헤어지자.
철수: (힘없이) 무슨 소리야?
수진: (웃으며) 철수씨 말이 맞았어. 영원히 행복할 수는 없는 거야.
철수: 대체 무슨 소리야?
수진, 계속 미소 짓지만, 그녀의 두 눈엔 눈물이 고여있다.
수진: (웃으며) 알잖아?... 기억이 사라지는데 행복이 무슨 소용이고 결혼은 또 뭐야. 다 잊어버릴텐데. 나한테 잘해 줄 필요없어. 난 다 까먹을 거야.
철수: 내가 대신 다 기억해 줄게. (애써 웃으며) 나 머리 좋잖아? 건축사 시험도 한 번에 딱 붙고.
수진: (웃으며) 자기는 너무 자신만만해.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 줄 알아?
철수, 수진을 끌어안는다.
철수: (슬픈 얼굴로) 그런 건 안 잊어먹네.
수진: 그걸 어떻게 잊어버려. 못 됐어.
철수: 곧 치료법이 나올 거야. 걱정하지 마.
수진: (철수의 눈에 비친 눈물을 보며) 부모를 잃었어, 나라를 잃었어? 울긴 왜 울어? 그냥 나만 가면 돼. 나 보내주라. 응?
철수: (분위기 처절하다) 내가 다 기억해준다니까? 내가 있잖아! 다 잊어버리면 내가 짠, 하고 나타난다구. 새로 꼬시지 뭐. 그럼 새로 시작하는 거야. 알았지?
철수의 어깨에 얼굴을 대고있는 수진, 흐느끼고 있다.
수진: 누가 넘어간대? 또 수염 기를려구? (잠시 침묵) 그럼 뭘 해? (흑흑...) 다 잊어버릴텐데... 기억이 사라지면 영혼도 사라지는 거잖아. (울음이 터지며) 나 무서워!...
수진, 몸을 쭈그리고 힘없이 흐느낀다. 철수, 울음을 억지로 참으며 쭈그리고 앉은 수진의 어깨를 치켜 올린다.
철수: 다 나한테 맡겨. 알았지?
철수, 곧장 수진의 어깨를 쓰다듬으며 거리로 그녀를 이끈다. 어두운 골목길을 천천히 걸어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 가로등을 지나는 순간, 두 사람의 그림자가 하나가 된다. 이때, 철수는 걸음을 멈추며 수진에게 속삭인다.
철수: (밝은 표정으로) 그림자 보여? 하나밖에 안보이지? 우리가 하나라서 그런 거야...
결국 어렵게 미소 Love Theme 시작?를 얼굴에 띄우는 수진. 두 사람 다시 걷기시작 한다. 어둠의 공허함 속에 사랑이 느껴진다...
[FADE-OUT:]
94. 철수의 집 아침 몇 개월 후 (다시 가을?)
[음악 Love Theme 게속?이 은은하게 울려 퍼지며...] 앨범 속의 옛날 사진들을 보고있는 수진, 그리고 멀리서 수진을 바라보는 철수... 그녀는 과거를 기억하는 것일까?
[DISSOLVE TO:]
철수가 작은 노트와 인덱스카드, 그리고 포스트잇들에 뭔가를 열심히 적어나가는 모습이 보인다... 시간이 계속 흘러가는 느낌으로...
[DISSOLVE TO:]
거리에는 낙엽이 떨어지고... 카메라, 변해있는 집의 내부를 훑어 보여준다. 냉장고에 붙어있는 별의별 '포스트잇'들이 보인다. 기억을 상기시켜주기 위한 노력의 흔적이다. 상상을 초월한 '기억 상기 표어'들도 눈에 띈다. [예: 뜨거운 물(빨강)... 찬물(파랑)...] 벽에 붙은 희한한 소품들도 사방을 가득 메우고 있다. (오히려 더 헷갈릴 것 같은 아이러니가 느껴진다...) 벽에 붙어 있는 철수와 수진의 사진 위엔 두 사람의 이름이 적혀있다. 다른 가족들의 사진과 이름들도 옆에 보인다. 화장실에도... 방에도... 문 앞에도 [예: '열쇠 잠그는 법']...
영상이 보여지는 동안 들려오는 수진의 목소리:
수진: (목소리만) 서울시 @#구 %#&동 628에 16번지... 우편번호 135에 8... 8...
약통을 열며 수진을 바라보는 철수. 조금 경직된 표정.
수진: 895.
얼굴이 금새 환해지는 철수, 약통에서 알약을 꺼낸다. 알약을 수진에게 건네며:
철수: 난 누구?
수진: (웃으며) 최철수.
철수: (능청스럽게) 그대는?
수진: 김수진.
수진, 물을 마시며 약을 삼킨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철수.
철수: 어때?
머리를 흔들어 보는 수진, 두 눈동자를 위로 귀엽게 굴려보다가...
수진: (환하게 웃으며) 개운해. 싸악 다 난 것 같아.
철수: 좋아. 좋아. 그리고, 나갈 때 이거 잊지말고...
철수, 수진의 목에 목걸이를 걸어준다. 목걸이에 수진의 신분증이 매달려있다. 철수, 도시락을 챙겨 들고 막 문을 나서려는데:
수진: 오늘 일찍 와.
철수: 응.
수진: 6시까지.
철수: 응. 근데 왜?
수진: 오늘 자기 어머니 생신이잖아. 또 까먹었어? 이거 먹어.
수진, 철수에게 조금 전 그 약통을 건넨다. 철수, 말없이 웃는다.
수진: 양가 식구 모두 초대했어. 사수할아버지도... 맛있는 음식 많이 해놓을 테니까, 꼭 시간 맞춰 와야 돼!
철수: 파출부 아줌마 불러줄까?
수진: 괜찮아. 혼자 할 수 있어.
철수: (잠시 고민하다가) 꼭 집에서 해야 돼? 집도 이렇게 어지러운데?
수진, 말없이 철수를 쳐다본다. 철수, 그냥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을 나선다.
철수의 집 밖:
철수, 조금 걷다가, 수진이 배웅하러 나올 줄 알고, 뒤로 돌며 손을 흔들려고 하는데, 문은 닫혀있고 수진은 보이지 않는다. 철수, 씁쓸한 표정으로 발길을 옮긴다...
95. 조계종 총본산 공사터 낮
땅을 파고 기둥을 세우는 기초공사가 한창이다. 카메라, 공사터 근처에 세워진 간이 작업실 안으로 노과장과 몇몇 외국인들을 따라 들어가면 철수와 사수, 그리고 늙은 목수 몇 명이 철수가 디자인한 문양을 깎아내는 작업을 하고 있다. 철수, 들어오는 이들을 쳐다본다.
[CUT TO:]
철수, 영어로 된 초청장을 보고 있다. 조금 난감한 표정.
노과장: 꼭 가셔야 합니다. 세계적인 건축가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자리에요.
철수: (외국인들을 쳐다보다가) 언제라구요?
노과장: 한 달도 남지 않았어요. 여권은... 있으시죠?
철수: 비행기 타본 적도 없습니다.
철수, 사수를 쳐다보면 사수는 철수에게 고개를 끄덕인다... 철수, 수진 때문인지 여전히 표정이 밝지 않다.
노과장: (목소리만) 참 이상하네. 기쁘지 않으세요?
96. 철수의 집 오후
부글부글 끓고있는 주전자와 냄비에서 김이 모락모락 새나오고있다. 수진, 부엌칼로 열심히 야채를 썰고있다. 수진, 문득 무슨 기억이 났는지, 야채를 썰다 말고, 손에 부엌칼을 들고 냉장고 앞으로 간다. 달력을 유심히 보는 수진, 달력엔 오늘까지 'X'표가 그려져 있고, 오늘 날짜엔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다. 그리고 그 밑에는 '시어머니 생신'이라고 쓰여져 있다. 가만히 서서 생각에 잠기는 수진. 의문에 찬 표정이 이상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이때, 갑자기 '딩동!' 초인종 소리가 들린다. 수진, 기쁜 마음에 문 쪽으로 달려간다.
수진: 자기?
수진, 문 앞에 크게 적혀있는 문구["일단 '누구세요?'라고 물어본다!"]를 무시하며 문을 여는데, 문 앞에 서있는 사람은 다름아닌 용준이다. 가슴엔 종이 상자를 안고 있다. 종이상자에는 "김수진 팀장 꺼"라고 매직펜으로 적혀 있다. 수진은 박스는 보지 않고 용준의 얼굴을 바라본다. 순간 표정이 굳어진다.
용준: 물건들 좀 가져왔어. 우리 어디 나가서 얘기 좀 할 수 있을까?
용준, 박스를 내려놓는다. 수진, 갑자기 얼굴에 환한 미소가 드리워진다. 다시 기대감에 부푸는 용준, 수진의 어깨너머로 부엌에 잔뜩 쌓여있는 음식들을 본다.
용준: 오늘 무슨 잔치 있어?
수진: 잔치? 무슨 잔치? 어서 들어와!
용준: 아니야. 좀 나갈 수 없을까?
수진: 나가긴 왜 나가? 들어와.
용준, 이때, 수진의 손에 쥐어진 부엌칼을 발견한다. 긴장한 눈초리로 쳐다보는데 수진 칼을 쥔 채 두 손으로 용준을 껴안다시피 안으로 데리고 들어간다. 용준, 끌려들어간다. 수진, 용준을 소파에 앉히려는데 용준, 거부한다.
용준: 그냥 서서 얘기할게. 뭐 하나만 물어보자.
수진: (왜 앉지 않을까, 의아한 눈초리로) 물론이지. 뭔데?
용준: 몇 달 전 일 기억하지? 길거리에서. 수진이가 날 부를 떄 '용준씨'라고 했던 거... 넌 우리 사귈 때만 그렇게 불렀어.
수진: 그게 뭐 이상해?
용준: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고싶었어. 넌 결혼도 했는데...
이때 밖에서 철수가 다가오는 것이 보인다. 수진과 용준은 눈치채지 못한다. 철수, 천천히 걸어오다가 문득, 거실 통유리창 너머로 수진과 용준이 서 있는 모습을 발견한다.
수진: 뭐? 용준씨! 내가 결혼을 해?
용준: 무슨 소리야? 너 결혼 안 했어?
수진: 용준씨, 왜 그래, 또. 나 버리려고 그래? 응? 나 버리지 마.
용준: 너 왜 이래? 정신 차려. 무슨 헛소리야!
용준, 수진의 두 팔을 잡고 흔든다. 수진, 황당한 얼굴로 흔들림을 당한다. 손에 여전히 부엌칼을 쥔 채로... 이때 문밖에서 이를 보는 철수, 상황을 알지 못하고 용준이 수진을 괴롭힌다고 생각한다. 철수, 집안으로 곧장 뛰어들어간다. 수진과 용준, 모두 놀라 뒤로 돌아본다.
수진: (달려들어오는 철수를 보며, 용준의 뒤에 숨으며) 어머, 저 사람 누구야?
철수, 뭔가 말하려는 용준의 얼굴을 주먹으로 가격하면서, 이성을 잃은 듯 용준을 집 밖으로 끌어낸다.
수진: 어?
수진, 둘 사이에 끼여들어 말리려다가 부엌칼로 그만 철수의 팔에 상처를 낸다. 철수, 잠시 멈칫하다가 계속 용준을 끌고 나간다.
97. 철수의 집 밖 계속
집 앞의 뜰로 용준을 개 끌듯이 끌고 나오는 철수. 용준, 철수의 힘을 당해내지 못하고 허우적대며 땅을 긴다. 용준을 무자비하게 갈기는 철수, 다시 노가다 기질이 발동한다. 눈빛이 야수 같다. 한편, 집 밖으로 천천히 따라 나오는 수진, 몰려오는 현기증에 힘없이 벽에 기대어 선다. 두 눈을 갸름하게 뜨며 싸움을 지켜본다. [다시 좁혀지는 수진의 시야... 소리가 '웅웅' 거리는 사이...] 두 남자의 모습이 수진의 눈에 들어온다. 누가 누군지 알아보기 힘들다... 수진의 손에는 여전히 부엌칼이 쥐어져 있고... (순간, 철수의 잔인한 얼굴이 칼날에 비친다.)
벌써 피투성이가 되어있는 용준, 철수에게 빌듯이 애원한다.
용준: (입에서 피를 흘리며) 잠깐만요. 잠깐만! 자~잠, 잠깐! 잠깐!
철수, 아랑곳하지 않고, 용준을 계속 때린다. 철수, 잠시 후, 때리다 지친 듯 땅에서 일어선다.
용준: (혀꼬부라진 발음으로) 됴아! 듁일테면 듁여! 근데, 이것만 알아 둬! 수진인... 결혼생활이 지긋지긋하대! 나와 2년 전으로 돌아가고 싶어해!
철수: (숨을 헐떡이며) 오, 그래? 축하한다! 썩을 놈아! 좋겠다! 뒈진 다음에 만나서 잘 살아봐라. 엉!
이를 악무는 철수, '좋겠다!'라는 말을 반복하며 용준을 발로 차다가 마구자비로 밟는다.
용준: 어억!
입에서 피를 토하는 용준, 마치 죽기직전 같다... 마침 이때, 수진과 철수의 식구 김사장, 수진의 어머니, 정은, 사수, 철수의 어머니...들 모두가 동시에 우르르 나타난다.
정은: 으악!
모두가 철수의 짐승 같은 잔인함에 경악한다. 제정신으로 돌아온 철수, 자신도 섬뜩 놀라며 뒷걸음 친다. 피 묻은 두 손을 등뒤로 숨긴다. 공포에 사로 잡힌 식구들... 엄청난 충격에 굳어있는 김사장(수진의 아버지), 멀리 서있는 수진을 돌아본다. 이 순간 수진은 정신을 잃는다. 부엌칼이 떨어지고, 수진은 바닥에 쓰러진다.
정은: 아악!~ 언니!
98. 철수의 집 밤
철수는 무표정하게 마루에 앉아있다. 김사장은 뻐금뻐금 담배만 피우고있고... 마루 한구석에는 피투성이가 된 용준이 부자연스럽게 숨쉬며 누워있고, 용준을 간호하고 있는 오마담(철수의 어머니)이 보인다. 용준은 눈을 뜨고 있는 상태... 부엌엔 사수가 차를 마시며 가만히 앉아있다. 그 옆엔 나머지 식구들 모두가 모여 앉아있다. 모두들 표정이 심각하다. 한편, 수진은 방 침대에 누워 자고있다.
아무도 말을 하지 않는다. 그러다, 갑자기 수진의 어머니가 울음을 터뜨린다. 정은도 함께 운다. 방에서 자고있던 수진, 울음소리에 눈을 뜬다. (벽을 보고 누워있던 터라, 아무도 그녀가 깨어있는 것을 알지 못한다.)
김사장: 자넨 아직 젊으니 우리가 보살필게.
철수: 아닙니다.
김사장: 그 병은 집안 내력이네. 지금은 모르지만 얼마후면 똥오줌도 못 가리는 게 치매야. 자네가 보살필수 있겠어?
수진의 어머니: (흐느끼며) 맞는 말씀이셔. 우리 딸이니까, 우리가...
철수: 제 사람입니다. 제가 보살피겠습니다.
김사장: 무슨 말 하려는지 알아. 하지만 지금은 좀 현명해져야 돼.
철수: (한숨을 쉬며) 이제 그만 하시죠. 제가 데리고 삽니다.
김사장: (언성을 높이며) 제발 정신 좀 차리게!
철수: (큰소리) 그만 하십시오!
김사장: 뭐?!
철수: 이제 좀 나가주세요!
김사장: 이 사람이!
정은: 어, 언니!
이때, 문지방에 서있는 수진을 발견하는 철수, 그리고 가족들 모두... 수진이 문지방에 가만히 서서 말한다.
수진: (나지막이) 왜들 그러세요? 무슨 일에요?...
이때, 수진의 긴 가운 아래로 소변이 주르륵 흘러나온다... 안타까운 표정으로 눈을 돌리는 사수... 철수, 서둘러 일어나 수진에게 달려간다. 나머지 사람들 모두 괴로워하며 고개를 떨군다. 용준도 이 상황을 목격하고 있다. 수진의 어머니, 통곡하기 시작한다. 수진을 부둥켜 안는 철수, 급히 방안으로 들어가며 문을 닫는다.
문을 잠그며 수진을 부둥켜안는 철수. 한편, 문밖에선 수진의 어머니가 잠긴 문을 두들기며 계속 통곡한다. 철수, 울컥 나오는 울음을 참으며 방 안을 둘러보다가 입고 있던 윗도리를 벗으며 무릎 꿇는다. 수진의 젖은 두 다리를 자기 윗도리로 닦기 시작하는 철수. 이때, 수진의 손이 철수의 어깨를 만진다. 철수, 올려보면 수진이 몽롱한 미소로 철수를 내려다 본다.
수진: 이 흉터가 다 뭐야?
철수: (울컥, 그러나 미소로) 멋있지?
수진: (팔의 상처를 발견하고) 어, 이건 또 뭐야? 싸웠어?
철수, 슬픈 표정으로 고개를 돌린다.
[밖에선, 카메라, 닫힌 문에서 서서히 빠진다...]
99. 철수의 집 밖 늦은 밤
철수, 모두가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사수도 멀리 떠나고 있다. 철수, 가만히 옆을 보면 오마담이 동정의 눈으로 철수를 보고 있다. 철수가 자기를 쳐다보자 어쩔 줄몰라 하는 오마담. 철수, 드디어 어머니에게 입을 연다.
철수: (조용히) 생일 축하해요.
오마담: (눈물 글썽) 고마워.
철수, 잠시 아무 말 없다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는 뒤로 돌아 집으로 향한다. 오마담, 철수를 한참 바라보다가 길가쪽으로 걷기 시작한다. 울컥하며 고개를 떨구는 오마담의 뒷모습...
100. 철수의 집 안 새벽
다른 옷을 입고있는 수진, 식탁에서 뜨거운 홍차를 마시고 있다. 철수, 수진을 마주보고 식탁에 앉는다. 수진, 문득 식칼을 들어보는데 식칼 끝이 뭉그러져 있다.
수진: 칼이 왜 이렇게 됐지? 어떻게 된 거지? 용준씨는 알아?
철수, 다시 충격을 받는다. 하지만, 전혀 내색하지 않는다.
철수: 나도 잘 모르겠는데...
수진: (의심찬 눈빛으로) 내가 그런거지? 왜 솔직히 말을 안 해? 내가 자꾸 보고싶다고 귀찮게 해서 그런 거 아냐?
철수: (억지로 미소 지으며) 무슨 말이야?
수진: 사랑하는 게 뭐가 잘못이야? 약속만 지키면 되잖아? 첫째, 휴일에는 전화 안하기. 둘째, 회사 얘기 안 하기. 셋째는 뭐더라.
철수, 눈물을 억지로 참으며 웃는다.
철수: (웃으며) 그러지 말고, 우리 아예 같이 살자. 이렇게. 여기서.
수진: 정말?
철수: (환한 미소로) 그럼...
수진: (철수에게 안기며) 용준씨, 사랑해...
철수: 그래...
철수, 수진과 함께 웃지만, 마음은 견딜 수 없는 고통뿐이다. 수진, 철수를 용준씨라 부르며 안긴다. 그리고 철수를 끌고 침대로 데리고 간다. 철수, 마지못해 끌려들어간다. 수진, 옷을 벗으며 철수의 옷도 벗긴다. 둘, 침대로 쓰러지고 수진, 열심히 철수의 젖꼭지 등에 키스한다. 철수, 쓸쓸한 모습으로 가만히 있는다. 아무래도 욕망이 일어나지 않는 듯. 잠시 후, 철수, 수진의 얼굴을 붙잡아 자기 얼굴과 마주보게 만든다. 수진, 어리둥절한 표정이다.
철수: 오늘은 안 하면 안될까?
수진: 왜? 피곤해?
철수, 고개를 끄덕이고 수진, 약간 아쉬워하며 시트 속으로 몸을 파묻는다. 철수, 멀뚱히 누워 있다 밖으로 슬그머니 빠져나온다. 빠져나오는 철수의 등 뒤로 수진,
수진: 용준씨, 나 버리면 안돼.
[CUT TO: 철수의 작업창고]
작업창고 안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오는 철수...
그는 고글(goggles)을 눈에 끼고 뭔가를 뚝딱뚝딱 만들고 있다. 예전에 그리던 둘이 살 미래의 집 모형이다... 고글에 김이 서려 철수의 눈이 잘 보이지 않는다. 고글의 유리 바깥면을 닦는데, 김이 안 닦인다. 철수, 결국 고글을 벗으면 고글 안에 눈물이 고여있다. 철수의 두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흐른다. 철수, 그러나 일을 계속한다. 묵묵히 눈물을 닦으며 작업을 계속한다. 낡은 대패를 집어 대패질을 계속한다...
어느새 창고 안으로 아침 햇살이 스며든다. 완성된 미래의 집 모형을 바라보는 철수, 그것을 조심스럽게 들고 거실로 들고 간다...
[CUT TO: 두 사람의 방]
아름다운 햇살이 따스하게 내리쬐는 방안... 그 빛살을 받으며 (이상하게도 사선으로) 침대에 누워있는 수진. 그녀는 아름답다. 철수는 정장차림으로 문지방에서 그녀를 바라보고있다. 잠시 후 수진이 사슴처럼 눈을 뜬다. 곧장 철수가 눈에 들어오자,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철수를 바라본다. 그리고 부드럽게 일어나 철수에게 안긴다. (그녀의 행동이 사랑스럽다. 그러나, 그녀는 용준에게 안기는 것일까? 아니면 철수일까?)
[CUT TO: 부엌]
식탁 테이블에 놓인 미래 집의 모형을 보고있는 수진. 철수는 그녀 옆에서 그녀를 지켜보고 있다.
수진: 창문이 좀 크면 안될까?
철수: 왜 안돼? 이따가 밤에 고칠게. 얼만큼 크게?
수진: 몰라. 그냥 햇볕이 잘 들게...
철수: 알았어... 갔다 올께.
문을 여는 철수에게...
수진: 용준씨!
철수: (다시 또 충격) 으, 응?
철수, 수진을 바라보면...
수진: 사랑해!
철수: (미소 지으며) 그래...
철수, 미소가 영 자연스럽지 않다. 철수가 문을 나서며 말한다.
철수: (울컥) 일찍... (울컥) 올께.
문이 닫힌다. 창가로 뛰어가 창문을 통해 아이처럼 철수를 훔쳐보는 수진... 철수, 눈을 만지며 멀리 걸어가고있다...
고요한 집안에 혼자 남은 수진, 마루 한가운데 서있다가 주위를 둘러본다. 냉장고 문에 사진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사진 앞에 서는 수진. 사진을 유심히 본다. 철수와 수진의 어느 행복한 순간을 찍은 사진이다. 위에는 둘의 이름이 쓰여져 있다.
'철수' 그리고 '수진'
한참 사진을 바라보는 수진... 깊은 생각에 잠긴다.
[CUT TO: 작업창고]
작업창고 안을 걷는 수진, 창고 안을 느리게 둘러보며, 작업 테이블 위에 살며시 손을 댄다. 이때, 수진의 눈 앞에 보이는 철수의 예전 모습...
[INSERT:] 먼지투성이의 철수, 작업 중 고글을 벗으며 지친 표정으로 수진을 쳐다보며 살짝 미소 짓는다.
이때, 수진, 갑자기 뭔가 기억이 난 듯, 놀라며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는다. 그리고 울먹이기 시작한다...
[CUT TO: 다시 부엌으로...]
수진, 흐느끼며 냉장고에 붙어있는 사진을 허겁지겁 떼어낸다. 벽에 붙어있는 사진들도 몇 장 떼어낸다. 앨범에서도 사진을 허겁지겁 뺀다... (기억이 한 순간에 사라질까봐...) 수진, 뭔가 결심한 표정으로 서둘러 식탁에 앉아 편지지에 글을 써내려 가기 시작한다. 펜을 쥔 그녀의 손, 아주 급하게 움직인다...
101. 이박사의 진료실 낮
철수, 입에 담배를 물고 있다. 철수, 자기도 모르게 담뱃갑에서 담배를 또다시 꺼내며 입에 물려고 한다.
이박사: 하나씩만 펴...
철수, 웃지도 않고 담배를 다시 집어넣는다.
철수: 이제 절 알아보지도 못해요.
이박사: 그 마음 나도 알지. 그렇다고 너무 자학하지는 말게. 가장 최근의 기억부터 사라지니까. 그냥 물리적인 과정일 뿐이야. 알츠하이머는 그런 병이라구. 환자를 탓해봐야 헛된 일이야.
철수: 제 두 눈을 바라보면서 옛 남자 이름을 부를 때... 그리고 사랑한다고 말할 때, 도대체 진짜 사랑하는 건 누굽니까? 그때를 못 잊고 있는 거죠, 네?
이박사: 못 잊는 게 아니고 그저 기억에 남아있는 것뿐일 거야. 난 의사야. 두 사람의 사랑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해줄 수가 없어. 사랑이야 사랑을 받은 본인이 더 잘 알겠지. 스스로에게 물어보게.
102. 기차역 안 낮
벤치에 앉아있는 수진, 이야기 도입부의 기차역 씬과 같은 옷을 입고있다. 작은 여행가방 한 개가 수진 옆에 놓여있다. 수진은 옆에 앉은 어린아이와 아이의 그림책을 보며 놀고있다.
수진: 이름이 뭐야?
아이: 유리.
수진: 참 예쁜 이름이구나?
이때, 구름이 개이며 햇빛이 기차역 안으로 들어온다. 햇살이 갑자기 수진의 어깨에 닿는다. 순간, 어깨에 닿은 빛을 보며 기시감(d j vu)을 느끼는 수진. 표정이 뭔가 다시 기억이 날듯하다. 그러다 유리에게 다시 말을 거는 수진.
유리: 여기다가 내 이름 적어줘.
수진: 좋아. 넌 이름이 뭐야?
유리: 언니 내 이름 또 잊어버렸어? 아까도 얘기 했는데! 이름 예쁘다 그래 놓고! 또 물어보고. 또 물어보고. 왜 자꾸 놀리는 거야! 으앙!~
유리, 울부 짓는다. 사람들이 수진과 유리를 번갈아 쳐다본다.
수진: 미안해. 울지마.
유리: 내 이름 빨리 말해! 엄마!~ 이 언니가 자꾸 놀려!~ 으앙~!
옆에서 졸고있던 유리엄마, 울부 짓는 유리를 데리고 가버린다. 수진, 가만히 앉아 한숨을 쉰다. 어깨에 닿는 햇살이 얼굴을 내리 쬐기 시작한다... 구름 사이에 보이는 해를 바라보는 수진의 눈...
103. 철수의 집 오후
철수, 마루에 멍하니 서있다. 집안엔 아무도 없다. 식탁 위에 놓인 편지를 보는 철수. 편지를 읽어내려 간다...
수진의 목소리: 철수씨, 갑자기 기억이 떠올라 편지를 써요. 지금 이 기억도 언제 사라질지 몰라서, 생각나는대로 써요. 글씨가 엉망이죠? 이해해주세요. 저는 당신만을 사랑해요. 우선 이것부터 씁니다. 당신, 최철수만을 사랑해요. 오해는 하지 마세요.
[INSERT:] 경찰서에 수진의 행방불명서류를 접수하는 철수의 모습. 그녀의 서류가 비슷한 종류의 서류 무더기 위에 얹어진다. 허무하다...
수진의 목소리: (계속) 갑자기 어젯밤 일들이 떠올랐어요. 뭘 기억하기가 무서워요. 기억이 남아있는 이 짧은 시간 동안 어떻게 내 마음을 전할 수 있을까. 아, 마음이 급해요. 저, 김수진은 당신, 최철수를 사랑합니다. 이것만은 잊고 싶지 않은데. 잊으면 안되는데...
수진이 떠난 집... 창가의 포스트잇, 바람에 날려 떨어지고... 철수는 망연자실한 모습에 수염은 다시 더부룩하게 길어있다... 처음 앉아있던 그대로의 자세에, 편지도 여전히 손에 쥐어있다...
104. 최철수 설계사무소 며칠 후
편지내용은 계속 이어지고, 철수는 책상에 앉아 편지를 멍하니 보고있다...
수진의 목소리: (계속) ...인생은 참 신비로워요. 건망증 때문에 당신을 만났고 바로 그 건망증 때문에 당신을 떠났어요. 당신을 만난 건 내 일생 최고의 행운이었어요. 나는 당신을 기억하지 않아요. 당신은 그냥 나한테 스며들었어요. 나는 당신처럼 웃고, 당신처럼 울고, 당신 냄새를 풍겨요. 당신 손길은 그대로 내 육체에 새겨져 있어요.
[INSERT:] 공사판에서 노가다1이 철수에게 작업관련 심각한 이야기를 한다. 철수 귀에는 하나도 들리지 않는다. 인부들이 그에게 무슨 얘기를 하는 데 아무것도 안 들린다...
수진의 목소리: (계속) ...당신을 잊을 수는 있겠지만 내 몸에서 당신을 몰아낼 수는 없어요. 한 번도 날 사랑한다고 말한 적이 없지만 나는 알아요. 철수씨도 나를 사랑한다는 걸... 그러니 내가 이렇게 마지막 순간을 내 멋대로 하는 것을 용서해주세요. 마지막으로... 아버지께 부탁한 게 하나 있어요. 한번 만나주세요...
편지를 멍하니 들고 있는 철수, 매우 고독해 보인다...
105. 김사장의 집 밤
서류 한 장을 멍하니 보고있는 철수. 이혼서류다. 철수, 결심을 한 듯한 표정을 마주 앉은 김사장에게 날리고는 이혼서류를 갈기갈기 찢어버린다.
김사장: (약간 놀라지만) 그렇게 지긋지긋했던 옛날의 고생이... 이제는 너에게 복을 가져다 주고 있어. 근데 그걸 한 순간에 버린다는 게 말이 되냐? 말이 돼? 일해... 일을 하라고! 수진이는 이놈아 우리가 찾을 테니까! 프랑스 가! 가라고! 그렇게 가고 싶어 했잖아, 임마! 인생에 그런 기회가 자주 오는지 알아!
철수: (나지막이) 용서란 미움에게 방 한칸만 내주면 된다는 말 아시죠? 나에게 그걸 가르쳐준 여자에요. 난 꼭 해줄 말이 있습니다. 그 말을 못해주면 프랑스고 나발이고 내 인생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나에 대한 기억이 사라지기 전에 말해줘야 돼요.
담배를 물며 고개를 떨구는 김사장, 눈시울이 벌게진다...
106. 수진이 다니던 패션회사 낮
상처가 많이 아문 서용준실장, 철수를 마주보고 말한다.
용준: ...그게 답니다... 나도 그날 왜 못나왔는지 너무 말해주고 싶었는데... (아쉬운 표정으로) 꼭 저 때문에 이렇게 된 것 같아서 죄책감이 말이 아닙니다.
철수, 멍하니 용준을 바라보고 있다.
107. 기차역 낮
'찰칵찰칵...' 소리만 나는 어느 지나가는 사람의 라이터, 가스가 떨어졌는지 켜지지 않고... 첫 장면에 나왔던 노숙자가 담배 피우기를 포기한 듯... 곧장 벤치에 드러누우며 말한다.
노숙자: 사랑이고 돈이고 있으면 뭐하냐... 불이 없는데... (안 피운 담배를 바닥에 던져버리면서) 버리자 버려... 불도 없는데... 어차피 홀로 가는 몸, 다 버리는 거야... (중얼중얼) 잊어버려...
철수, 손에 쥐고 있는 그 나무조각품(수진 인형)을 다시 내려다본다. 근처에 쓰레기 통이 보인다...
108. 야구 연습장 밤
철수, 혼자서 고독하게 배트를 휘두른다... '탕' 뻗어나가는 공... 철수, 다음 공이 날아오는데 휘두르지도 않는다. 뒤를 돌아보면, 철수의 상상:
[INSERT:] 철창 뒤에 서있는 수진이 어린아이처럼 자신을 응원하고 있다...
철수, 수진의 환영 쪽으로 다가간다. 눈앞에는 수진이 박수치고 귀엽게 응원하는 모습이 보인다.
철수: (혼잣말로) 그래, 공을 끝까지 봐야지?
수진의 환영, 귀엽게 동전을 세고 있다. 철수, 철수 미소 지으며 철창에 기댄다.
철수: (수진의 환영을 향해) 수진아, 내가 왜 야구에 그렇게 환장했었는지 이제야 겨우 알게 되었어. 왜? 수진이 너, 희생타, 번트 알지? 넌 날 위해 희생타를 연달아 날렸어... 근데... 이런 씨발. (주먹으로 철창을 치며) 나한테도 번트칠 기회를 줘야 될 거 아냐? 이런 씨발... 야, 씨발, 너 가면 어떡해? 아 씨발, 나 또 혼자잖아! 씨발 썅!...
철창 근처에서 줄 서있던 젊은 남녀, 철수의 모습에 긴장하며 물러선다.
야구여: (야구남을 당기며) 어머 어머 미쳤어. 오빠 가자.
109. 이박사의 진료실 낮
멍하니 이박사를 바라보며 담배만 뻐금뻐금 피우는 철수. 이박사는 책을 덮으며 시계를 본다.
이박사: 이제 가봐. 그리고 이제 오지마.
철수, 말없이 멍하니 이박사만 바라본다.
철수: (나지막이) 숨이 막혀요... 혼자가 될까 두려워요... 보고 싶은데 어디 있는지 찾질 못하겠어요... 조금 더 지나면 정말 날 몰라 볼 텐데... 그 전에 할 말이 있는데... 그 말을 듣고 싶어할 텐데... 그 말을 하면 수진이가 떠날까 봐... 그렇게 많이 들으면서 저는 단 한 번도 그 말을 해주질 못했어요. 이기적인 자식... 꼭 말해 줘야 되는데... (눈물을 흘리기 시작한다.) 진짜... 사랑하는데...
이박사 담배에 불을 부치고 한 모금 내쉰다.
이박사: (담배를 뻐금뻐금) 내 마누라 죽기 전에... 우리가 처음 만났던 곳에 데리고 간 적이 있었는데 말야... 진짜 신기하게도 거의 모든 걸 기억하더란 말이지... 너무너무 기뻤는데 눈물이 자꾸 나는 거야... 정말 그대로 다시 마누라 기억이 돌아오는 줄 알았어... 근데 그렇게 한 세시간 지나니까 다시 나를 보면서 '누구세요? 누군데 그렇게 우세요?' 이러는 거야... 사람의 머리라는 게... 그래서 신기한 거야.
뭔가 깊은 생각에 잠기는 철수...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이박사: (웃으며) 그냥 내 경험이야. 책에도 없어...
110. 철수의 집 낮
몹시 지저분해진 집안... 철수, 여행트렁크를 문 앞에 놓고, 우체통에 가득 실린 우편물들을 꺼낸다. 무심코 우편봉투 하나 하나를 넘겨본다. 지로 통지서, 광고 엽서, 전단 등등... 그러다 발신인 불명의 편지를 발견한다. 철수, 서둘러 편지를 뜯어본다. 즉각 놀라는 철수, 편지를 읽어나간다.
편지: (수진의 목소리) 철수씨, 생일 축하해요. 이 편지를 읽으실 때, 당신은 내 기억 속에서 이미 사라지고 난 후겠죠?
철수, 갑자기 편지봉투의 빨간 우체국 소인을 살핀다. '강원도... XX시...' 철수, 눈동자를 굴리며 잠시 생각하다가 편지지와 봉투를 손에 들고 문을 박차고 나간다. 집안에 그냥 놓여진 여행트렁크...
111. 고속도로1 낮
고속도로를 달리는 철수의 차. 철수, 지도를 보며, 빠르게 차를 운전한다.
수진의 목소리: ...나는 열심히 살고 있어요.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 산은 백두산, 높이는 2744미터, 두번째는 한라산, 높이는 1950미터, 세번째는 설악산, 높이는 1708미터...
112. 산속의 요양병원 낮
안개 속의 요양병원 정문에서 서둘러 뛰어나오는 철수, 차에 다시 올라탄다.
수진의 목소리: (계속) ... 그때 편의점에서 내가 뺏어먹은 당신 콜라는 코카콜라 다이어트, 값은 600원, 광복절은8월 15일, 크리스마스는 12월 25일. 보세요? 잘 하죠?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113. 산속의 고속도로 낮
안개 낀 고속도로를 달리는 철수의 차. 속도계가 빠르게 올라가고 있다.
수진의 목소리: (계속) ...이제 나는 잊어버리세요. 나도 잊어버릴건데, 억울하지도 않아요? 좋은 사람 만나서 행복하게 살아요. 성질 부리지 말고. 철수씨는 의외로 결혼생활에 재능이 있어요. 마누라였으니까 누구보다 내가 잘 알아요.
철수의 차, 안개를 뚫고 나오면 바다가 보인다. 그리고, 멀리 요양병원 하나가 보인다.
114. 바닷가의 요양병원 낮
주차장에 주차 된 차 안. 백미러를 보며 수염을 깎는 철수... '왱~~'
간호사: (목소리만) 입원하자마자 상태가 급속히 악화됐어요...
철수, 이발소의 그 면도로션을 얼굴에 바른다. '챡챡...'
요양병원 로비:
도움데스크 앞에 서있는 간호사, 철수에게 말한다.
간호사: ...지난 주부터, 매일아침마다 저한테 '처음 뵙겠습니다'라고 말해요. 이제 환자는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자기 옷도 제대로 입지 못해요... 보호자를 시어머니 오정자씨 이름으로 올려서 남편이 죽었는줄만 알았는데...
요양병원의 2층 복도:
간호사를 따라 복도를 걷는 철수.
간호사: (계속) ...시어머니는 애초 연락도 안됐고... 그나마 환자는 이곳에서 제일 말썽 안 부리는 착한 환자에요.
간호사는 곧 방 번호 '203' 앞에 선다. 간호사, 철수를 한번 본다. 철수, 약간 긴장한 기색이다. 방문을 느리게 여는 간호사. 철수는 조용히 간호사를 따라 환자 방에 들어간다.
115. 203호 환자실 계속
적당한 사이즈의 하얀 환자실. 깔끔한 인테리어에 나무로 되어있는 가구들만 있다. 언뜻 보면 바닷가의 별장 같다. 환자실 안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느리게 방안을 둘러보는 철수... 화장대에 사진 한 장이 붙어있다. 철수와 수진의 사진... 철수의 얼굴 위에는 '철수'라고 쓰여져 있고, 수진의 얼굴 위에는 '나'라고 써져 있다. '철수'라는 글자 옆에는 망치 그림과 '야구' '성질' 이라고 씌어있고 마지막에 아주 작게 '사랑'이라고 쓰여져 있다.
간호사: (귓속말로) 원래 사진이 많이 붙어있었는데 기억하기 힘들다고 환자가 직접 뜯어버렸어요. 이쪽으로...
간호사, 철수를 베란다쪽으로 안내한다. 바람에 나부끼는 하얀 커튼 사이로 널찍한 베란다가 보인다. 간호사와 철수, 베란다로 나온다. 바다와 산의 조화로운 경치가 매우 아름답다. 베란다 모퉁이에 여자 한명이 바다를 향해 앉아있다. 그녀는 스케치북에 뭔가 그리던 중... 간호사, 여자의 어깨를 잡는다. 고개를 돌리는 여자. 수진이다. 수진의 창백한 얼굴에 눈시울이 벌게지는 철수. 가만히 서서 그녀를 바라본다.
간호사: 손님 오셨어요.
수진: 손님?
수진, 스케치 북을 들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철수를 바라본다. 한참 그를 바라보며 뭔가 골똘히 생각한다... 그러다 살짝 미소 짓는다. 함께 미소 짓는 철수, 기대에 부푸는데... 갑자기 스케치북이 수진의 손에서 빠져 베란다 바닥에 떨어진다. '촥' 펼쳐지는 스케치북... 바람이 불며 '수루룩' 종이가 넘어간다. 이때, 종이에 그려진 그림이 보여진다. 모두 철수의 얼굴 여러 스타일의 그림. 유치원생 스타일에서 어른 스타일까지...
수진이 의도한 게 아니고, 수진의 실력이 저하된 것임.이다. 철수, 스케치북을 빠르게 집어 수진에게 건넨다. 수진, 스케치북을 받으며, 철수의 환한 얼굴을 바라본다. 그리고...
수진: (정중히) 감사합니다.
수진, 철수가 왜 가지 않나 하는 눈초리로 의심스럽게 쳐다본다. 철수, 가야되나 말아야되나, 망설인다.
철수: 저, 모르시겠어요?
수진: 누구시죠?
철수: (망설이다 다시 인사를 하며) 처음 뵙겠습니다. (고통스럽지만 애써 밝은 얼굴로) 저, 최철수라고 합니다.
철수, 가슴이 찢어지게 아프지만, 조용히 고개 숙여 수진에게 공손히 인사한다.
116. 요양원 야외식당 낮
야외식당으로 천천히 걸어가는 철수와 수진, 그리고 그들 뒤를 따르는 간호사.
[CUT TO:]
테이블을 마주보고 앉은 수진과 철수, 그들 사이에 간호사가 앉아있다. 셋은 음식을 먹고있다. 철수, 몸을 앞으로 기울이는데, 수진의 표정이 변한다. 수진, 갑자기 철수의 목쪽에 코를 가까이 댄다. '킁킁...' 냄새를 잠시 맡아보는 수진... 철수, 약간 놀라며, 수진의 반응을 기다린다...
수진, 잠시 후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한다.
수진: (답답한 표정으로) .. 어디서 들어본 냄새, 이... 어떤 버스가 택시를, 삼촌이 떡볶이하구, 이 냄새는... 어디에... 어... 기억... 왜... 꿈... 꿈나... (한숨을쉬며) 아무것도... 미안... 왜 이렇게 말이 안되려고...아.
괴로워하는 수진. 듣다못한 철수, 주머니에서 야바위 세트를 꺼낸다. 수진, 어리둥절. 철수 그 앞에서 열심히 야바위를 한다. 수진, 또 뚫어져라 야바위를 본다. 야바위가 평소에 비해 좀 느리다. 철수가 동작을 멈추자 손가락으로 하나를 가리킨다. 철수, 카드를 젖히면 왕이 나온다. 수진, 뛸듯이 기뻐한다.
수진: (손으로 쌍권총을 만들어 쏘아대며) 얏호
두 사람, 모두 순간 기시감으로 멈칫하며 눈을 마주친다.
철수: (쌍권총을 잡으며 심각하게) 나 버리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아? 우리, 그래서 결혼했잖아?
수진, 진지하게 철수의 눈을 바라본다. 기억이 돌아온 것일까? 그러나 잠시 후, 수진, 손을 빼며 몸을 움츠린다.
수진: 아저씨, 무서워요.
[CUT TO:]
식사를 계속하는 철수와 수진. 간호사, 갑자기 수진에게 말한다.
간호사: 음식은 삼키는 거에요. 이렇게... '꿀꺽' 좋아요. 잘했어요!
생각에 잠겨있던 철수, 수진을 말없이 지켜보다가, 뭔가 결심한 듯 간호사에게 조용히 말한다 엔딩음악 시작....
철수: 여기서 밖으로 외출 가능합니까?
117. 편의점 - 낮
편의점 근처의 거리. 택시가 정차하면 간호사와 수진이 택시에서 내린다. 수수하게 옷을 차려 입은 수진, (일상 복을 입고 있는) 간호사의 안내를 따라 거리를 천천히 걷는다. 수진의 손에는 가늘고 예쁜 지팡이가 있다. 거리를 걷던 수진, 갑자기 표정이 변한다. 어디 선가 본듯한 편의점이 보인다...
편의점 안 창문 너머로 수진을 보고있는 철수. 수진이 편의점 쪽으로 가까워지자 몸을 돌린다. 수진, 편의점 앞에 서서 간호사를 한번 본다. 간호사, 고개를 끄덕이며 한번 들어가 보라고 손짓한다. 수진 머뭇거리다 편의점 문을 연다. 이때, 바람이 불어오며 수진의 머리가 휘날린다 [slow-motion]. 편의점 문이 열리며 철수가 나타난다 [slow-motion]. 철수를 보는 수진, 무언가 강렬한 기억에 사로잡히는 것 같다. 철수는 수염이 조금 길어있다. 철수, 수진을 보며 콜라 캔을 딴다. '촤악...' 시원한 탄산가스 터지는 소리가 들린다. 철수, 수진을 바라보며 콜라 캔을 들고있다. 긴장되는 순간...
수진, 콜라를 철수에게서 천천히 빼앗는다. 수진, 약간 미소를 띄우며, 콜라를 마신다. 그리고 남은 것을 철수에게 건넨다. 그리고는 편의점 안으로 들어간다. 수진, 천천히 카운터로 향하면 이박사가 카운터에서 수진의 지갑과 콜라를 건네준다. 지갑과 콜라를 받는 수진, 뭔지 모를 느낌에 감격한다. 수진, 서서히 편의점 안을 둘러보면, 사수가 편의점 유니폼을 입고 대걸레로 걸레질을 하고있다. 사수는 수진에게 눈인사를 한다. 눈시울이 벌게지는 수진, 기억은 잘 안 나지만 느낌이 온다. 또다시 편의점을 둘러보는 수진. 김사장, 어머니, 오마담, 그리고 정은이 먹을 것을 고르는 것을 본다. 모두 미소 지으며 수진에게 눈인사를 한다. 수진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린다.
수진, 계속 자기 등뒤에 서있던 철수를 돌아본다. 수진 아름답게 흐느낀다. 철수,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수진을 바라본다.
수진: (울먹이며) 여기가... 천국인가요?
철수: (미소 지으며) 예.
철수, 수진을 밖으로 안내한다. 편의점을 나서는데 어디서 본듯한 여자들이 서있다. 윤아, 지현, 명주다. 수진, 그들에게 인사하며 철수를 따라간다. 철수는 근처에 세워져 있던 자동차에 수진을 앉힌다. 출발하는 철수의 차...
118. 고속도로 오후
달리는 철수의 자동차... 멀리 고속도로에 큰 빌보드 하나가 보인다. 정장입고 덩크슛하는 모습이다. 수진, 덩크슛 빌보드를 그냥 무표정하게 바라만 본다. 기억을 못하는 듯...
수진은 몹시 행복해보인다. 운전을 하는 철수, 바지 주머니에서 그 미완성 나무조각품(수진 인형)을 꺼내 수진에게 건넨다. 수진, 그 인형을 보고 기뻐한다. 철수, 자기를 보고 미소 짓는 수진에게, 머뭇거리다 입을 연다:
철수: 사랑해...
수진, 몹시 기뻐하며 철수의 볼에 키스를 한다. 미소 지으며 기쁨을 삼키는 철수... 더욱 빠르게 달리는 차... 차는 어디로 달리는 것일까? 철수와 수진, 서로를 보며 행복하게 웃는다.
[FADE OUT:]